2004년 11월 12일 금요일

[펌]「성실성」의 환상

어린이용 위인전기를 보면 그 시대나 사회가 추구하는 가치관을 엿볼 수 있다.

어린이들이 ‘존경하는 인물’ 부동의 1, 2위인 세종대왕과 이순신은 물론이고, 김유신이나 율곡, 퇴계 같은 위인전 단골 주인공들의 이야기로부터 ‘야인시대’니 ‘영웅시대’니 하는, 그보다 덜 유치하지도 않은 어른용 위인전기들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비범함’이다.

심상치 않은 태몽이나 가족환경으로부터 시작해서, 남달랐던 어린 시절, 그리고 아무나 상상할 수 없는 기지와 용기로 극복해온 난관들에 관한 이야기가 우리 전기들의 기본요소다.

그 다음으로 들 수 있는 요소라면 아마 ‘성실함’일 것이다. 어머니와 떨어져 고행과도 같은 산중 수련을 해내며 먹물 대신 물을 찍어 바위에 글씨를 써댔던 한석봉으로부터, 독서 삼매경에서 깨어나면 어깨에 쌓인 먼지부터 털어내야 했던 수많은 선비들을 거쳐, 피를 토하도록 소리를 지르고야 ‘득음’의 경지에 오르던 소리꾼까지. 성실함은 비범함과 더불어 우리 사회에서 ‘위인’이 되는 열쇠였다.

반면, 상대적으로 외국의 위인전들은 ‘진실함’이라는 요소를 공유한다. ‘국부’라는 조지 워싱턴 이야기의 핵심은, 아끼는 정원수를 베어버린 놈이 누구냐고 불같이 화를 내시는 아버지 앞에서, 선물 받은 도끼의 성능을 시험하느라 자신이 잘랐노라고 나서는 어린 워싱턴의 ‘진실함’에 있었다.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이라는 링컨의 성공비결 역시 시골 가게 점원 시절 물건을 두고 간 손님을 위해 수십 리 밤길을 걸었던 일화로부터 시작된다. 백악관에서 음란한 짓을 했다는 것보다도, 그 사실을 애초부터 순순히 털어놓지 않은 ‘거짓됨’이 탄핵이유였던 클린턴의 경우도 바로 이런 위인들과의 대비에서 시작된다.

물론 그 인물이 존경할 만 한 이라는 뜻은 절대 아니다. 문화 코드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어린 시절 읽었던 맥아더 전기의 한 대목에도 이런 내용이 있었다. 그가 웨스트포인트 생도 시절, 교수님에게서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 이론에 관해 연구하여 발표하라’는 과제를 받게 된다. 그런데 그 난해한 이론을 채 이해하기도 어려웠던 맥아더는 그냥 적절한 관련 논문 한 편을 찾아서 통째로 외워버리고는, 발표장에서 그 내용을 외워서 읊어댄다.

그러자 교수님은 약간 무리했던 과제를 놀랍게 완수한 맥아더에게 박수를 보내며 도대체 어떻게 그 난해한 이론을 이해했는지 묻는다. 이 때, 맥아더는 약간의 고민 끝에 ‘용기를 내어’ 사실은 그 이론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으며, 논문 한 편을 암기해버린 것뿐이라는 고백을 하게 되고, 그 교수님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자네는 진실을 말할 용기를 가진 사람이군. 다음부터는 어렵더라도 이해해서 발표를 하도록 해’라며 격려를 해주었다는 이야기였다.

이 대목을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물론 그 진실함을 강조하는 거야 그렇다 치더라도,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을 통째로 외워버리는 것이 도대체 왜 ‘용기를 내어 고백해야 할 만큼’ 잘못된 행위이며, 그 성실성에 대한 칭찬은 왜 한 마디도 없는 것인가?

내가 만난 수학선생님들은 대개 첫 수업의 일성(一聲)으로 이런 이야기를 하곤 했다.

“수학을 이해하는 과목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착각이다. 수학은 암기과목이다. 공식을 외우고, 문제유형을 외우면 된다. 그 다음에는 유제를 얼마나 많이 풀어서 그 변형태에 적응하느냐가 남을 뿐이다.”

단군 이래 최고의 베스트셀러로 꼽히는 ‘수학의 정석’은 이러한 수학선생님들의 공리에 충실했다. 공식과, 기본문제와, 유제, 그리고 연습문제. 논리학의 한 부분이던 수학이 그렇게 이 땅에서는 암기과목으로 자리잡아왔다.

어쨌거나, 닥치는 대로 달달 외우는 성실함과, 그것을 받쳐주는 암기력이야말로 우리 시대 성공의 비결이었다. 정해진 시험범위의 교과서를 달달 외워 내신을 채웠고, 또 학력고사를 치렀고, 사법고시와 의사시험을 통과했다.

어린 시절, ‘공부 잘하는 아이’가 곧 ‘착한 아이’이며 ‘리더십이 뛰어난 아이(반장감)’라는 등식이 대략 성립할 수 있었던 것 역시, 공부를 잘 한다는 것이 곧 성실하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즉, 공부를 잘 하는 아이는 놀고 싶다는 욕망을 슬기롭고 우직하게 억누르고 암기에 매진한 아이인 반면, 공부를 못하는 아이는 놀고 싶다는 얄팍한 욕망에 패배한 아이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길러진 암기력의 화신들인 법관과 의사가 우리 시대 최고의 직업으로 선망을 받아왔고, 그 이전에 ‘서울대 출신’이라는 타이틀은 ‘보증된 인격’을 의미했다. 반면 창의력이 필요한 ‘예체능’이란 영역은 거의 ‘직업반’과 동의어로 인식되어온 것이 우리 시대였다.

그래서 영화배우나 가수로 출세한 사람의 경우 여전히 바탕은 천박한 행운아 정도로밖에 보지 못하는 것이 우리 생각의 밑바탕이다.

시대가 바뀌었다고 말한다. 정보화 시대를 말하고, 지식산업사회를 말한다. 또 문화의 시대를 이야기한다. 창의력이 핵심이며, 놀 줄 아는 것이 돈이 된다고 말한다. 무한 복제되는 소프트웨어와 복제 불가능한 아이디어가 가치를 생산하는 시대에, 더 이상 성실한 양적 축적의 기술이 자리 잡을 공간은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이공계 기피를 걱정하고, 인문학의 위기를 말한다. 아이들은 의사와 변호사가 되기 위해 대학 강의실에서 ‘정석’을 푼다. 암기력이 출세의 수단인 동시에 그 사람의 도덕성을 평가해주던 시대에 대한 감성은,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에 뿌리 깊게 ‘암기’되어 있다.

우리에게 ‘놀이’란 여전히 ‘성실하게 매진하기 위한 머리 식힘’에 불과하다.

아마도 조용필과 전인권의 전기가 널리 읽히는 시대가 와야 할 것이다. 그래서 학교도 내팽개치고 친구들과 떠난 길에서 퉁겨대던 기타 소리가 얼마나 감미로웠는지 마저 느낄 수 있어야 노는 것이 힘이 된다. 개미같이 일하고 넉넉한 겨울에 놀이를 즐기겠다는 발상부터 버리고, 노는 것으로 일을 삼으면서도 얼어 죽지 않고 봄마다 다시 나타나는 베짱이의 삶을 연구할 때다.

한 해 사시합격자 1000명의 시대를 거쳐 로스쿨의 시대로 가면서, 벌써 변호사가 학원 강사만 못한 수입을 올리는 시대를 맞고 있다. 또, 동네 개인병원들이 줄줄이 문을 닫고 있는 시대가 왔다. 지식정보화 사회라는 거창한 슬로건을 들이대지 않더라도, 과거급제로 운명을 바꾸던 시대는 이미 지나고 있는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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