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1월 24일 수요일

[펌]가문 콤플렉스로 몰락한 나폴레옹

프랑스가 오늘날 유럽에서 목에 힘 줄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준 것은 삼색기를 앞세우고 근대 유럽을 제패한 나폴레옹의 전쟁 덕분이다. 그러나 그런 프랑스를 전쟁의 소용돌이에 몰아넣은 것도 그의 덕택이기도 하다.

나폴레옹이 프랑스에 기여한 공과 실은 여러 있지만 오늘날 위인 중의 한 명으로 위인전기에 오르내리는 공로의 제일로 본다면 전 세계 인류에게 왕정(王政)의 폐지와 민주주의(民主主義)의 씨를 뿌려 주었다는 점이다. 자신은 스스로 공화정(共和政)을 몰락시키고 황제가 되었지만, 역사적 측면에서 역설적이겠지만 전통적 유럽 군주들을 밑으로 끌어내리는 하나의 선례를 만들어주었다.

나폴레옹의 화려한 활동들은 익혀 알려져 있으나 몰락의 주요 원인을 대부분 영국과의 전쟁에서 패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런 식의 나폴레옹 몰락은 종국적으로 영국이 유럽의 군주들을 구한 것이지만, 후일담이나 나폴레옹이 가져다 준 전쟁의 여파는 단 100년 후에 진가(眞價)를 발휘해버리지만 말이다.

나폴레옹은 전형적인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자신의 능력만으로 출세했고 시대상황이 그를 유명인사로 그리고 프랑스가 처한 국가적 윤명은 그를 황제까지 만들어주었다.
물론 스스로 황제지위까지 올랐지만 당시의 유럽은 나폴레옹을 단지 섬 출신의 미천한 군인으로 밖에 보여지지 않았다. 이런 점에 대해 무시할 줄 모르고 너무나도 예민하게 반응했던 나폴레옹의 성격이 그의 빠른 몰락을 재촉하였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미미한 가문에 대해 심각한 콤플렉스를 가진 정신적으로 불행한 남자였다. 항상 출세하면서 어떻게 하면 자신의 신분을 높은 고지로 올릴 것이가에 대해서 연구해온 그런 인물이었다. 이런 방향으로 보면 그는 그다지 위인처럼 보이지 않고 한낱 세속적 속물로 비칠 뿐이다.
그가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황제가 된 것도 이 모두 자신의 존귀함을 전 시대의 부르봉가문보다도 더 빛나야 한다는 심리적 콤플렉스의 표현 이기도했다.

프랑스의 군주가 된 나폴레옹이 가장 먼저 한 일이 바로 “유럽의 새로운 국왕 만들기”였다. 마치 빵 굽는 가마 솥에서 빵을 구워내듯이 국왕들을 구워내었다. 자신의 형제자매들을 모두 제패한 영토의 군주로 만들어 가문의 고귀함을 자랑하려 애썼다. 자신의 최대 정적들인 일부 군주의 영토를 빼앗아 자신의 형제들에게 나누어 준 것이다. 빼앗긴 자들은 대부분 오랜 시간 세습해온 군주들이었고 이들의 분노는 안 봐도 뻔한 상태였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국민들에게는 신적인 존재였지만 프랑스 밖에 나가서는 이른바 죽일놈 이자 코르시카의 촌놈일 뿐이었다. 나폴레옹이 형제들을 국왕으로 만든 후 전형적인 왕족만들기 즉 혈연관계를 통해 피를 섞어버리는 인류의 고전적 가치를 충실히 재현한다. 미국여성과 결혼한 사랑했던 막내동생 제롬을 이혼시켜버리고 강제로 뷔르템베르크 공주와 결혼시켰고, 자신이 총애하는 의붓아들은 바이에른 공주와 결혼시켜준다. 그리고 그 자신도 진정한 유럽 왕가의 일원이 되기 위해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를 협박해서 황제의 딸이며 프랑스가 단두대로 죽여버린 그 마리 앙뜨와네뜨의 조카손녀를 자신의 침실로 끌여 들여 아들까지 낳게 한 것이다.

출신 가문의 번영과 고귀함을 동시에 가지게 하기 위해 노력한 나폴레옹이지만 막상 그의 위기가 닥쳤을 때 가장 먼저 배신한 사람들이 바로 존귀함을 위해 헌신적 투자를 했던 자신의 형제자매 등 친척들이었다.
나폴레옹은 일찍 자식이 없어서 항상 후계가 불투명했다. 그러자 능력은 하나 없이 과실만 따 먹으려했던 그의 형제들은 누구 덕은 생각하지 않고 동생이자 형을 깎아내리려고 노력하는데 일평생 열심이었다. 특히 가장 혜택을 많이 본 형 조셉은 스페인 왕좌까지 차지했어도 동생이 죽으면 자신이 황제가 되어야겠다고 생각까지 한 인물이었다. 그는 가장 먼저 나폴레옹이 몰락 한 후 쫓겨났다.

나폴레옹이 존귀한 가문 만들기로 가장 공들인 곳은 자신의 아들 만들기였다. 어떻게 해서라도 자신의 아들은 유럽 군주들의 사촌 반열에 올라야했다. 이미 폴란드 여성과의 장성한 사생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열심히 귀한 아들 만들기에 몰두했다.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두 번 다시 겪지 않도록.
그가 가장 염두해 두었던 가문은 바로 러시아의 로마노프 왕가였다. 가장 큰 적대국이자 정치적 군사적 측면에서 혈연동맹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러시아황제는 자신의 미혼의 누이를 주려하지 않았다. 도리어 왕국을 상실해서 나폴레옹을 저주하던 네덜란드왕에게 시집보내버렸다. 결국 나폴레옹은 차선책으로 합스부르크 왕조에 강요하는 수밖에 없었다.

바다와 육지에서 영국군에게 패배한 나폴레옹은 자신이 이럴 때를 대비해 만들어둔 주변국의 국왕 만들기 작업결과에 기대를 걸었다. 혹시 주변국에 있는 형제자매들이 원군이라도 보내줄 거라 생각했다. 또한 장인인 오스트리아 황제와 사돈인 바이에른과 뷔르템베르크의 도움도... 이 영국의 침공에 외면하지 않을 거라는 하나의 신념을 가지고...

파리는 적에게 점점 포위되어 들어오고... 사면초가였을 때 형제들은 그의 이런 처지를 외면하고 도리어 나폴레옹의 적들과 협상해서 어떻게 하든 자신의 왕관만을 보존해야겠다는 이기심에 사로잡혀 배신행위에 급급했다. 더구나 장인이며 자신의 아들의 외조부인 오스트리아황제는 영국과 프로이센과 비밀리 동맹을 맺고 협동으로 프랑스를 공격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엄청 열 받았을 것이다.

마지막 순간 나폴레옹을 보호한건 그들의 친척들이 아니라 이름 없는 프랑스의 국민과 군인들이었다. 다시 비록 백일천하 였지만 파리로 재입성 했을 때 그를 열렬히 마중 나온 사람들은 그를 미천하지도 볼품없는 섬의 촌놈으로 보지 않았다. 그들에게 그는 프랑스의 영광을 안겨준 위대한 황제였다.

권력이란 덧없지만 나폴레옹처럼 덧없는 권력자도 없을 것이다. 결국 그렇게도 원했던 자신의 보나파르트 가문은 황제를 3명이나 배출한 황제가문이 되었으나, 그 고귀함을 누린 사람들은 자신을 미워하고 헐뜯고 음모를 꾸몄던 그들 형제자매와 그들의 자녀들이 차지해버렸다. 자신의 아들은 젊은 21년의 삶을 마치고 아내도 자식도 없이 요절해버렸다.

오늘날 프랑스에는 절대 보나파르트 가문 사람은 대통령이 되지 못하게 법으로 정하고 있다. 그 이유는 나폴레옹1세와 그의 조카 나폴레옹3세가 선거로 대통령이 된 후 황제가 된 똑같은 전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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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사람들을 어떻게 구성할 지도 참 중요한 것 같다.
조조 같은 경우는 이런 사태를 경계해서 자신의 아들 몇 명 외에는 권력을 주지 않았고
철저히 능력 위주로 뽑았는 데,
결국 위나라가 3대에 이르러서는 왕실을 보호해줄 사람이 없어서 사마의에게 나라를 빼앗긴다.
반대로 사마의는 너무 많은 친척을 관직에 등용시켜서
사마염 이후 시대에 팔왕의 난을 겪으면서 가족들끼리 싸워서 무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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