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1월 24일 수요일

방망이를 깎던 노인 - 윤오영

  벌써 40여 년 전이다. 내가 갓 세간난 지 얼마 안 돼서 의정부(議政府)에 내려가 살 때다. 서울 왔다가는 길, 청량리역(淸凉里驛)으로 가기 위해 동대문(東大門)서 일단 전차(電車)를 내려야 했다. 동대문 맞은편 길가에 앉아서 방망이를 깎아 파는 노인이 있었다. 방망이를 한 벌 사 가지고 가려고 깎아 달라고 부탁을 했다. 값을 굉장히 부르는 것 같았다. 좀 싸게 해줄 수 없느냐고 했더니,
  "방망이 하나 가지고 에누리하겠소? 비싸거든 다른 데 가 사우."
대단히 무뚝뚝한 노인이었다. 더 깎지도 못하고 잘 깎아나 달라고만 부탁했다. 그는 잠자코 열심히 깎고 있었다. 처음에는 빨리 깎는 것 같더니, 저무도록 이리 돌려보고 저리 돌려보고 굼뜨기 시작하더니, 이내 마냥 늑장이다. 내가 보기에는 그만하면 다 됐는데 자꾸만 더 깎고 있다.
  인제 다 됐으니 그냥 달라고 해도 못 들은 척이다. 차시간이 바쁘니 빨리 달라고 해도 통 못 들은 척 대꾸가 없다. 사실 차시간이 빠듯해왔다. 갑갑하고 지루하고 인제는 초조할 지경이다.
  "더 깎지 아니해도 좋으니 그만 달라."
고 했더니, 화를 버럭 내며
  "끓을 만큼 끓어야 밥이 되지, 생쌀이 재촉한다고 밥 되나."
나도 기가 막혀서
  "살 사람이 좋다는데 무얼 더 깎는다는 말이요. 노인장(老人丈) 외고집이시구먼. 차 시간이 없다니까."
노인은 퉁명스럽게
  "다른 데 가 사우. 나는 안 팔겠소." 하고 내뱉는다.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그냥 갈 수도 없고, 차시간은 어차피 틀린 것 같고 해서, ( ㉠ .)
  "그럼 마음대로 깎아 보시오."
  "글쎄 재촉을 하면 점점 거칠고 늦어진다니까. 물건이란 제대로 만들어야지 깎다가 놓치면 되나."
  좀 누그러진 말씨다. 이번에는 깎던 것을 숫제 무릎에다 놓고 태연스럽게 곰방대에 담배를 담아 피우고 있지 않은가. 나도 고만 지쳐 버려 구경꾼이 되고 말았다. 얼마 후에 노인은 또 깎기 시작한다. 저러다가는 방망이는 다 깎아 없어질 것만 같았다. 또 얼마 후에 방망이를 들고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다 됐다고 내준다. 사실 다 되기는 아까부터 다 돼 있던 방망이다.
  차를 놓치고 다음 차로 와야 하는 나는 불유쾌(不愉快)하기 짝이 없었다.
  '그 따위로 장사를 해 가지고 장사가 될 턱이 없다. 손님 본위(本位)가 아니고 제 본위다. 그래 가지고 값만 되게 부른다. 상도덕(商道德)도 모르고 불친절(不親切)하고 무뚝뚝한 노인이다.'
  생각할수록 화증(火症)이 났다. 그러다가 뒤를 돌아보니 노인은 태연히 허리를 펴고 동대문 지붕 추녀를 바라보고 섰다. ㉡그 때, 그 바라보고 섰던 옆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노인다워 보이고 부드러운 눈매와 흰 수염에 내 마음은 약간 누그러졌다. 노인에 대한 멸시(蔑視)와 증오(憎惡)도 감쇄(減殺)된 셈이다.
  집에 와서 방망이를 내놨더니 아내는 이쁘게 깎았다고 야단이다. 집에 있는 것보다는 참 좋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전의 것이나 별로 다른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런데 아내의 설명(說明)을 들어보면, 배가 너무 부르면 힘들어 다듬다가 옷감을 치기를 잘하고, 같은 무게라도 힘이 들며, 배가 너무 안 부르면 다듬이 살이 펴지지 않고 손에 헤먹기가 쉽다. 요렇게 꼭 알맞는 것은 좀체로 만나기 어렵다는 것이다. 나는 비로소 마음이 확 풀렸다. 그리고 그 노인에 대한 내 태도를 뉘우쳤다. 참으로 미안했다.
        - 윤오영, <방망이를 깎던 노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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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이공계라면 누구나 저 노인과 같은 심정일 것 같다.
하지만 손님에게 잘 설명을 하지 못하는 이공계에게도 문제는 있다.
상도덕도 모르고 불친절한 점, 무뚝뚝한 말투.
그리고 손님도 전문가를 좀 더 믿어줄 필요가 있다.
다 완성된 것 같지만 항상 QA(Quality Assurance)를 거쳐야만 제품은 믿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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