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4월 13일 화요일

[기사]'과학입국' 거짓말, 손해배상받고 싶다















'과학입국' 거짓말, 손해배상받고 싶다
현재 이공계 위기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보고 있는 층은 90년대 이후의 학번들이다. 이미 2000년대 이후 학번들은 위기의 징후를 읽은 탓에 이공계를 외면하고 안락함이 보장되는 의대로, 치대로, 한의대로 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90년대 학번들은 위기의 징후를 느끼지 못한채 과학기술자의 부푼 꿈을 안고 진학했다가, 갑자기 연구현장에서도 사회에서도 외면받는 현상을 맞닿고 있다고 한다. 때문에 이들이 느끼는 자괴감은 조금 더 절박하다는 게 많은 이공계 종사자들의 이야기다. 그들이 현재 느끼는 절절한 안타까움을 한 90년대 중반 학번의 이공계 대학생이 보내왔다.<편집자주>











2004년 04월 09일


이공계 96학번 대학생이 쏟아놓는 2004년 봄 캠퍼스 보고서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며 선진국이 코앞에 다가왔다는 자신감에 충만해 있던 1988년, 나는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그해 나는 각 학교에서 2명씩 보내주는 과학 실험 학교에 처음으로 뽑혔다. 과학 실험 학교는 이른바 과학 영재 프로그램으로, 각 학교에서 학생들을 뽑아 과학교육을 따로 실시하는 곳이었다. 나는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매년 학교에서 뽑혀 주말마다 과학 실험 학교에 다녔다.

그 시절에는 그저 학교에서 선발해 보내는 곳에 뽑혔다는 사실이 좋았을 뿐이었다. 그곳에서 항상 듣는 말은 ‘과학입국’이었다. 과학이 발전해야 나라가 발전하고, 그러기 위해선 이공계에 실력 있는 사람들이 많이 가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를 반복해 듣다 보니 과학이 썩 적성에 맞지는 않지만 나도 이공계로 가야만 할 것 같은 마음을 먹게 됐다.

고등학교 때는 70%의 학생들이 이과계열로 진학을 했다. 사실 나는 문과에 가고 싶었지만, 문과에 간다고 하면 으레 듣는 말이 있었다. “나중에 잘 살려면 이과를 가야 한다” 취직도 잘 되고 사람들한테 인정도 받으려면 무조건 이과를 가야 한다는 말들뿐이었다. 대세에 밀려 결국 난 96년 서울대학교 자연대에 입학했다.

그때만 해도 지금과 같은 의치대 과열현상은 없었다. 실력 있는 학생들 가운데 다수가 이공계로 진학을 했다. 컴퓨터나 전자공학 등 주로 공대 학과들이 가장 인기 높은 학과였고, 순수과학쪽도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지금, 너무나 많은 것들이 바뀌어버렸다. 이공계 학생들이 실력이 없어 기업에서 뽑지 않는다는 소문까지 들을 때는 꼭 사기를 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언제는 실력이 있으면 당연히 이공계로 가 나라 발전에 이바지하라며 몰더니, 이제는 애물단지 취급을 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갑자기 줄어든 대체복무로 군문제 심각

이공계의 대다수인 남학생들이 가장 먼저 겪게 되는 어려움은 군대 문제다. 이제까지 많은 남학생들은 병역특례업체에서 대체복무를 해왔다. 아니면 대학원에 진학해 연구직으로 군복무를 대신하곤 했다. 나처럼 군대를 다녀온 경우에는 복학을 한 후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군대에 다녀온 뒤 다시 책을 펴니 전공용어들은 너무나 생소했고 각종 공식들은 알 수 없는 기호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제 대부분의 이공계 남학생들이 나와 같은 어려움을 겪게 됐다는 점이다. 대체복무를 할 수 있는 자리가 갑자기 줄어들어 거의 없어지다시피 됐기 때문이다. 병역특례만 바라보고 군대 문제를 미뤄왔던 많은 3, 4학년생들과 대학원생들은 지금 먼 산만 바라보고 있다.

기계공학과에 다니던 후배 ㄹ은 지금 공군지원 시험공부를 하고 있다. 혹시나 병역특례로 군대 문제를 해결할까 싶어 정보처리기사 자격증도 따고, 대학원 진학도 준비하며 졸업을 1년 미뤄보았지만 후배는 결국 해결방법을 찾지 못했다. 결국 올해 초 졸업을 하고 과동기 몇 명과 함께 공군에 지원하기 위해 시험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다. 남들은 졸업하면 취업공부를 하는 마당에 군대 갈 걱정을 하니 막막하단다.

연구직 대체 복무를 바라보고 대학원 박사과정에 들어간 선배 ㅇ도 올해 군대에 갔다. 연구직 대체복무 수요가 대폭 줄어 1년에 1명 정도밖에 그 혜택을 받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 선배는 30살의 나이에 군대에 갔다. 하지만 군대에 다녀와서가 더 큰 문제다. 나이도 30대 중반에 이르고 박사과정을 중간에 그만두었으니 계속 공부하기도 애매하다. 취업은 거의 포기해야 할지 모른다.

군대 문제를 해결한다 해도 더 큰 문제인 취업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예전에는 대학원에 진학하는 경우를 빼고는 거의 대부분이 졸업하기 전에 취업이 결정됐다. 그런데 지금은 언감생심이다. 이공계에서도 전공을 살려 취업을 하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다.

재료공학과를 졸업한 동기 ㅂ과 선배 ㅅ은 요즘 계속 스터디 그룹을 만들어 변리사 시험공부를 하고 있다. 경쟁률이 20대 1이 넘기 때문에 보통 3∼4년 준비는 예상하고 있단다. 공대생들 사이에선 유일하게 안정적인 전문직으로 꼽히는 게 변리사인지라 점점 더 변리사 시험에 몰리는 학생들이 많아지고 있단다. 몇 년이 지나면 경쟁률이 훨씬 높아져 합격하기가 더 어려워질 것 같다며 만날 때마다 걱정을 쏟아놓는다.


박사과정 3년차, 미래는 없고 카드빚만

통계학과를 다니던 동기 ㅁ은 얼마 전부터 수능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치과대 시험을 다시 보겠다는 것이다. 통계학과면 그래도 취직이 좀 되지 않냐고 물었더니, 그것도 다 옛날 얘기란다. 그럼 졸업을 하고 의학전문대학원에 가면 되지 않느냐니까 워낙 많이 몰려 경쟁률이 너무 높다고 답한다. 게다가 기초과목이 많이 달라 어차피 걸리는 시간은 비슷해, 수능을 보는 것이 더 유리할 것 같다는 것이다. 얼마 전 전기공학과를 졸업하고 의학전문대학원을 알아보던 후배 ㅇ도 다시 수능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후배는 아직 군대도 다녀오지 않은 터라, 전기기사 자격증 시험을 신청해 군 입대를 미루면서 수능공부를 하고 있다. 대입에 실패하면 군대에 가야 해, 올해 수능에 올인해야 하는 처지다.

지난해 졸업한 지질학과 동기 ㅂ은 올해 사범대 대학원에 진학했다. 아무런 대안이 없어 그냥 전공 대학원에 밀려갔다가, 진로가 보장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갑자기 선회한 것이다. 사범대 대학원에 가서 교직자격을 취득하겠다는 것이 그에겐 현실적인 판단이었다.

전기공학과를 졸업해 IT업체에서 대체복무를 하던 동기 ㄱ은 복무가 끝나면 대학원에 진학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대학원에 진학해도 별 가능성이 없을 것 같다며 어학연수를 떠났다. 일단 영어라도 잘해야 일반 회사에라도 취직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란다. 하지만 어학연수를 간 지 1년이 다 되지만 한국으로 돌아올 생각을 않고 있다. 대략 짐작은 간다. 그곳에서 뭐든 가능성을 찾아보고 싶은 게 아닐까.

4년 전부터 사법고시 준비를 하던 고등학교 선배 ㅎ은 기계설계학과 출신이다. 이공계 위기란 말이 크게 돌기 전부터 “결국은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서 사법고시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그땐 대학 4년이 아깝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지만, 그걸 계속 부여잡고 있었다 해도 지금 나아질 게 없으니 일찌감치 선회를 한 그 선배가 아주 현명해 보이기도 한다.

그래도 계속 이공계를 지키고 있는 사람들의 상황은 얘기하나마나다. 시력이 좋지 않아 군 면제를 받고 일찌감치 대학원에 진학한 동기 ㅊ은 지금 통계학과 대학원 박사과정 3년차다. 그렇지만 아직도 박사과정을 마치면 무엇을 해야 할지 결정하지 못했다. 비슷한 선배들이 위로 겹겹이 많이도 있어 아직도 교수님 커피 심부름을 한다. 이공계 위기가 심화되기 전에 대학 졸업을 맞이한 그가 대학원에 가지 않고 바로 취직을 했다면 지금쯤 대리는 돼 있지 않을까. 하지만 대학원 진학을 한 이후, 조교까지 하면서 연구보조비도 받으며 학생 과외도 하지만 수입을 모두 합해도 100만원이 채 안 된다. 앞으로 상황이 나아질 조짐이 보인다면 그것을 희망 삼아 살아가겠지만, 대학원 박사과정이 남겨준 것은 장래에 대한 희망이 아니라 그동안 2배 이상 오른 등록금 때문에 빌려 쓴 카드빚뿐이다.

이래저래 이공계 출신들의 진로는 답답함 그 자체다. 대학에 들어올 때만 해도 이공계를 가야 장래도 보장되고 나라 발전에도 기여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에 벅찬 기쁨이 충만했다. 지금은 이공계를 나왔다는 사실이 주홍글씨처럼 느껴진다. 대학과 대학원 시절 내내 전공에 파묻혀 공부만 해야 한다며 밀어넣더니, 그러는 사이 그것들을 사용할 데가 없어졌다고 한다. 그간의 힘들었던 공부들이 다 쓸모없고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그 시간이 아깝게 여겨지기만 한다.

이공계가 발전해야 나라가 발전할 수 있다던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면, 그 수많은 뛰어난 인재들이 그냥 묻혀버리고 있는 지금은 분명 나라 발전이 심각하게 저해되고 있을 터다. 만약 그 말이 거짓말이었다면, 나는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를 하고 싶다. 초등학교 때부터 나에게 그런 거짓말을 되뇌인 것에 대해서 말이다.

김○○/ 서울대 자연대 96학번




[Economy21 19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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