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주의 문학(existentialism)
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현상을 부조리로 보고, 본질보다 구체적 실존을 중시하려는 사상이 실존주의이다. 기독교적 실존주의, 무신론적 실존주의, 행동적 실존주의가 있다. 이는 사르트르(J. P. Sartre), 카뮈(A. Camus)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 사조는 1950년대 전후의 한국 작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실존주의 문학 實存主義文學
실존주의를 대표하는 작가로는 사르트르, 보부아르, 카뮈 등이 있다. 그러나 이 명칭이 적용될 수 있는 범위는 명확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실존주의라는 용어를 협의로 사용하느냐 혹은 광의로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유동적이다. 넓은 견지에 설 때 우리는 합리주의적 인간관에 대한 의심, 삶에 대한 근원적 반성, 새로운 생존의 길의 모색 등을 보이는 모든 문학을 이 범주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그 경우에는 그리스 비극으로부터 현대문학에 이르는 동안에 나타난 수많은 문학사상과 작품에 대해서 ‘실존주의적’ 또는 적어도 ‘실존적’이라는 형용사를 붙이는 것이 가능하다.
그런데 근래에 이런 문학적 경향이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20여 년 간이었다. 러시아 혁명(1918), 세계적 경제위기(1929), 나치즘의 지배적 세력(1933 이후), 에스파냐내란(1936), 제2차 세계대전(1940), 그리고 그 후의 미 ·소간의 냉전, 엄청난 과학의 힘, 약소국가들의 대두 등으로 대표되는 일련의 중대한 역사적 사건들은 이성과 자유의 승리를 믿어온 낙관주의적이며 서유럽 중심적인 사상에 치명상을 입히고 기존의 가치체계의 전적인 붕괴를 의미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러한 배경하에서 1940년을 전후한 프랑스의 많은 작가는 사회와 생존의 현실을 투철하게 인식하고 새로운 바탕 위에서 삶의 의미를 괴롭게 추구하려는 공통된 경향을 띠게 되었다. 말로, 생텍쥐페리, 베르나노스는 이미 전전(戰前)부터 역량을 보인 작가들 중의 대표적 존재이며, 전후에는 사르트르, 보부아르 그리고 카뮈에 의해서 이 경향이 한결 심화되어 나타났다. 그리고 1947년경부터 저널리즘이 크게 유행시킨 실존주의라는 단어가 이들의 활동을 지칭하고, 사람에 따라서는 전전(戰前)의 작가들뿐만 아니라 도스토예프스키, 니체, 파스칼, 심지어는 그리스의 비극작가들을 그 사상적 선조(先祖)로 보려고 하였다. 이상이 넓은 의미에서 사용될 수 있는 실존주의 문학의 개념이다.
그러나 이것을 협의로 받아들일 때, 그것은 누구보다 사르트르를 중심으로 한 문학적 표현을 가리킨다. 사실에 사르트르는 자신의 실존철학과 창작활동을 긴밀히 연결시켰던 사람이다. 그는 특히 《존재(存在)와 무(無)》(1943)에서 인간 존재의 우연성, 의식과 대상의 관계, 인간이 타고난 괴로운 자유, 타인과 나의 존재론적 관계, 일정한 상황 속에서의 주체적인 선택을 통해서 생성(生成)되어 나가야 할 우리의 운명 등에 관해서 이론적으로 설명한 바 있다. 그리고 하이데거와 후설의 깊은 영향을 받으면서 형성된 이 철학적 성찰은 순리적(純理的)이며 사변적(思辨的)인 것이 아니라 인간의 구체적 양태와 행위에 대해서, 다시 말하면 인간의 실존적 모습에 대해서 뜻깊은 조명을 던진다는 커다란 이점을 지니고 있다. 바로 이런 점에서 그의 철학은 문학과 상통할 수 있는 깊은 관련이 있다.
그의 작품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존재와 무》를 비롯한 그의 철학적 저작에 표명된 인간관의 형상화(形象化)이며, 문학적 증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구토(嘔吐)》(1938)로부터 《문학이란 무엇인가》(1947)를 거쳐 《알토나의 유폐자(幽閉者)》(1960)에 이르는 수많은 소설과 희곡과 평론은 개인적 차원에서, 또 후기에는 사회적 차원에서 삶의 상황을 응시하고 분석하고 초월하려는 그의 매우 지적(知的)인 태도의 표현들이다.
이렇듯 실존철학을 밑에 깔고 있는 사르트르의 문학이 그 시대의 가장 큰 주목의 대상이 되자 보부아르와 카뮈도 역시 그와 동류의 작가로 취급되었다. 물론 그들에게 어떤 공통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보부아르는 여러 가지 면에서 사르트르와 흡사한 사상을 작품에 담았다. 그러나 그녀는 사르트르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섬세한 감성(感性)과 여성의 존재성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카뮈는 《이방인(異邦人)》(1942)과 《시시포스의 신화》(1942)에서 이른바 부조리성을 부각시켰다는 점에서 《구토》의 사르트르와 동질적인 작가로 속단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 두 작가의 사상적 ·감성적 출발점이 매우 다르고 그들의 도달점은 오히려 대극적(對極的)이라는 것이 더욱 더 밝혀지고 있다. 1951년 카뮈의 《반항적 인간》이 나오자 일어났던 두 사람의 극적(劇的)인 충돌은 그들을 갈라놓고 있는 거리가 지극히 멀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며, 카뮈 자신은 그 후 “나는 실존주의자가 아니다”라고 단언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문학사적 견지에서 볼 때 제 나름대로 인간 존재에 대한 근본적 재검토와 새로운 윤리의 모색을 시도한 이들의 문학을 ‘실존주의 문학’이라고 한데 묶어 부르는 것이 전적으로 부당하다고는 할 수 없다. 또한 이 명칭 속에 그리스도교적 입장에 선 마르셀의 작품이나 무니에의 평론이 의당 포함되며, 프랑스 이외의 지역의 작가, 가령 콜린 윌슨이나 그레엄 그린 등의 작품도 이 범주에 포함된다.
현대 불란서 실존주의자 사르트르는 "인간은 스스로 만드는 존재이다"라는 자기 초월적 인간관(니체 등)을 계승하면서도 인간 이외의 모든 것에서 독립된 인간 주체성(主體性)을 현대인들에게 제시한다.
인간은 스스로 만드는 존재이다. 사람은 존재 이후에 스스로를 원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이것은 실존주의의 제 1 원칙이다. 이것을 사람들이 주체성이라고 부르며, 동시에 그런 이름 아래서 우리를 비난하는 바로 그것은, 인간이 돌이나 탁자보다도 더 큰 존엄성을 가진 것이라는 점을 말하는 사실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왜냐하면, 우리는 인간이 먼저 존재하는 것, 즉 인간은 먼저 미래를 향해 스스로를 내던지는 것, 미래 속에 스스로를 투사함을 의식하는 것임을 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스스로의 기획(企劃)이다. 인간은 이끼나 부패물이나 양배추 같은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먼저 주체적으로 자기의 삶을 다스리는 하나의 기획(project)이다. 이 기획 이전에는 아무것도 있을 수 없다.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하늘에는 아무것도 없으며, 인간은 자기 자신이 되고자 원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 그가 그렇게 되려고 기획한 그 무엇이다. 왜냐하면 의지라고 보통 우리가 말하는 것은 의식적 결정이어서 우리를 대다수에 있어서 스스로가 만들어낸 것의 배후에 있기 때문이다.
★ 참고문헌 : 사르트르,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왕사영 역), 청솔 1983.
그러나 이 차원에까지도 시선이 집중된 것은 단독자(憺者)로서의 실존 혹은 자유의 결단을 앞둔 주체로서의 인간이기 쉽다. 실존주의가 과연 인간의 완전한 자유의 실현을 어떻게, 얼마나 성취하게 도와주느냐 하는 현실적 물음은 미해결로 남겨된다. 하이데거의 견해에 의하면, 인간은 자기가 이룰 최대한의 가능성을 실현시켜 나가는 방향으로 끊임없이 자기 현실을 넘어서서 나아가는 특징이 있지만, 이 초월은 불가피하게 無로 나아가는 초월이 되고 마는데, 그 이유는 인간에게 죽음도 궁극적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죽음은 자기 초월의 마지막 한계인가, 아니면 인간이 최종적으로 가장 위대하게 타인과 세계와 세계근거를 향하여 도약하는 초월의 현장인가?
더군다나 인간의 능력은 대개의 경우 무력하고, 우리가 원하는 데로 존재도 지식도 능력도 얻지 못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경험한다. 니체의 말로는 평범한 인간들이 초인(超人)으로 성장하려면 형이상학, 도덕, 종교 등의 속박을 부숴뜨려야 하고, 특히 "신은 죽었다"고 선포해야 한다는데, 과연 얼마나 많은 인간들이 그 꿈을 실현할 수 있는지 의문에 부쳐볼 만하다. 모든 도덕과 종교를 부정하고 파괴할만큼 인간이 힘있고 자유로운가는 인생 경험이 긍정적 답변을 들려주지 않는다. 그래서 인간의 자기창조에 열쇠가 되는 '자유(自由)'의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고,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다른 어느 학파보다도 인간의 자유와 악(惡)의 문제에 고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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