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만원으로 창업… 10년 후 33조원 회사로 키워 `델컴퓨터’ 마이클 델 회장 / 39세 | |||
34세에 미국 5대 부자로 꼽혀… 중간유통 생략한 조립형 맞춤 PC로 ‘대박’ 터뜨려 미국 델컴퓨터사의 마이클 델(39) 회장은 말 그대로 ‘초고속 인생’을 살고 있다. 1000달러(약 110만원)를 가지고 회사를 차린 것이 19세였다. 그후 5년여 만에 회사 규모는 3억8900만달러로, 그로부터 10년 뒤엔 300억달러(약 33조원)로 덩치가 커졌다. 같은 기간 회사 주식은 7만9000% 뛰어 올랐다. 포브스지(誌)가 선정한 세계 500대 부자에도 가장 어린 나이(27세)에 선정됐으며 34세에 미국 5대 부호에 뽑혔다. 우리나라라면 수능시험 치르고 막 시작된 캠퍼스 생활을 만끽할 나이에 벌써 ‘사장님’이었던 그는 1965년 2월 미국 텍사스주에서 태어난 이제 서른아홉의 ‘386’이다. 그의 인생은 어린 시절부터 초(超)고속적 요소가 내재해 있었다. 초등학교 3학년이던 1973년의 일이다. 집에 배달된 잡지 뒷면의 “간단한 테스트 하나만 통과하면 고등학교 졸업증서를 취득할 수 있습니다. 지금 도전하십시오!”라는 광고에 그의 눈길이 꽂혔다. 딱히 학교에 대한 반감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는 곧장 우편으로 테스트를 신청했다. 그후 어느 이른 저녁 테스트 회사 직원이 휴스턴에 있는 그의 집 문을 두드렸다. 그녀는 “마이클 델”씨를 찾았다. 뜻밖의 손님을 맞은 그의 어머니는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몇 가지 대화가 오간 뒤 곧 상황을 이해하게 됐다. 어머니는 “지금 샤워 중인데 곧 불러드리죠”라고 말했다. 이윽고 붉은색 목욕가운을 걸친 8살짜리 꼬마가 나타났을 때, 그 직원은 무척이나 놀랐다. 델 회장은 자신의 저서 ‘다이렉트 경영(Direct from Dell)’에서 “어릴 때부터 나는 무엇이든 불필요한 단계를 제거하는 일에 상당히 흥미가 있었다”고 적었다. 그의 사업가적 기질도 어릴 적부터 자란 것으로 보인다. 증권 중개인이던 어머니 덕에 유년시절인 1970년대 델의 가족 식탁에서는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 의장이 무엇을 했고, 그것이 경제와 인플레이션 수치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으며, 어떤 회사에 투자하고 어떤 주식을 사고 팔아야 하는지 등이 대화 주제들이었다. 그 중 어린 델의 머릿속에 오랫동안 남았던 단어는 ‘상업적 기회’. 델은 열두 살 때 이미 ‘상업적 기회’를 포착해 실제 돈벌이에 성공한 적이 있다.
당시 우표 수집에 몰두했던 그는 집에서 두 블록 떨어진 중국음식점에서 잔심부름을 하며 우표 수집에 필요한 돈을 모으고 있었다. 경매를 통해 우표를 구입했던 그 시절, 우표 가격이 오르자 어린 델은 우표 중개인들의 역할에 관심을 갖게 됐다. 불필요한 단계를 생략하기 좋아하고, 사업가적 분위기 속에 자란 그는 우표 가격 상승과 중개인의 역할 사이에서 ‘기회’를 본 것이다. 결국 그는 우표를 사기 위해 중개인들에게 돈을 지불하느니 내가 직접 중개에 나서는 편이 더 낫겠다는 생각에 이르렀고, 즉각 이를 행동에 옮겼다. 그는 이웃 사람들에게 그들의 우표를 자신에게 맡겨줄 것을 부탁했다. 우표잡지 ‘린스 우표저널’에 ‘델의 우표’라는 광고를 실었다. 그는 우표 경매상으로 당시 2000달러를 벌어들였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당시 그는 이제 ‘열두 살’이었다. 하지만 델 회장은 2000달러라는 돈보다도 중개인을 거치지 않을 경우, 훨씬 더 많은 이익을 남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점이 더 소중했다고 그 당시를 회고했다. 델에게 컴퓨터와의 운명적 만남이 찾아온 것은 열다섯 살 때인 1980년이었다. 학교에 있던 최신 텔레타이프 단말기 조작에 성이 차지 않던 그는 본격적으로 컴퓨터 가게를 어슬렁거리며 컴퓨터를 주무르기 시작했고, 정기적으로 간행되던 컴퓨터 잡지를 두루 섭렵했다.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던 그는 결국 고전적인 떼쓰기 전법으로 부모님을 졸라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애플’ 컴퓨터와 생의 첫 만남을 갖게 된다. 그러나 정작 컴퓨터가 집에 도착하자마자 그가 한 일은 컴퓨터를 켜고 게임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새 컴퓨터를 분해하는 일이었다. 부모님으로부터 엄청난 꾸중을 들어야 했다. 그렇게 갖고 싶어 하더니, 비싼 돈들여 사주자마자 ‘파괴’라니…. 하지만 델 회장에게 컴퓨터 분해는 대책 없는 파괴가 아니라 미지에로의 탐험이었다. 컴퓨터 몇 대를 못쓰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이 어떻게 작동되는지 살펴보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컴퓨터를 직접 해부 조립하는 당시 델의 체험은 컴퓨터 기업 델의 성공요인인 직접 조립 후 판매 방식의 뿌리가 된다. 그후 그는 의사가 되기를 바라는 부모님의 권유로 오스틴에 위치한 텍사스대에 진학하지만 학교로 떠나는 그날 그의 차 트렁크에는 3대의 컴퓨터가 실려 있었다. 그의 대학생활은 낮엔 수업을 듣고, 밤엔 컴퓨터를 업그레이드 하는 일과의 반복이었다. 컴퓨터광이라는 그에 대한 소문이 퍼지면서 그 지역의 변호사나 의사들이 자신들의 컴퓨터를 맡기기 시작했다. 컴퓨터 판매 라이선스를 취득해 텍사스주의 공개입찰에 참여하기도 했고, 실제로 입찰을 따내기도 했다. 그러나 아들의 학점이 형편없고, 수업도 곧잘 빼먹는다는 소식을 접한 부모님은 급기야 그의 기숙사로 찾아왔다. 방안에 가득찬 컴퓨터 부품들을 보신 아버지는 “이런 컴퓨터 따위는 당장 집어치우고 학업에 전념하라”고 다그쳤다. “도대체 너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뭐냐, 넌 도대체 뭐가 되고 싶은 거냐”고 소리쳤다. 그에 대한 델의 대답은 “저는 IBM과 경쟁하고 싶어요”였다. 이듬해인 1984년 5월 델은 대학을 중퇴하고, 거대기업 IBM과의 경쟁을 위한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한다. 당시 투여된 자본금은 단돈 1000달러였다. 매출액 해마다 50%씩 성장
이 직접 마케팅은 여러가지 면에서 혁명적 요소를 갖고 있었다. 우선 중간 판매상의 개입을 없앰으로써 기업이나 고객 모두 비용을 줄일 수 있다. 다른 회사들은 주문을 받기 전에 미리 컴퓨터를 만들기 때문에 고객이 원하는 컴퓨터를 추측할 수밖에 없지만, 델은 고객의 주문에 따라 컴퓨터를 구성하기 때문에 시장의 요구를 실시간 단위로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이는 공급자 입장에서는 고객이 원하지도 않는 쓸데없는 재고로 인한 비용을 줄일 수 있는 장점이 있었고, 소비자 입장에서는 자기가 원하는 부품과 스타일에 따라 만들어진 컴퓨터를 구입할 수 있으므로 그만큼 만족도가 높을 수밖에 없는 이점이 있었다. 당시로선 획기적인 이 발상은 PC업계에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IBM, 컴팩, HP 같은 메이커 PC보다 평균 20% 가량 저렴한 델사의 PC는 소비자들의 열렬한 갈채를 받았고, 델컴퓨터의 매출액은 매년 50%씩 성장하기 시작했다. 1988년 처음 미국 증시에 상장할 때 1억5900만달러에 불과했던 델의 매출액은 2001년 무려 310억달러로 치솟았고, 2004년 현재까지 불경기를 모르고 고도 성장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 11월 19일 영국 경제 일간지 파이낸셜타임스(FT)가 발표한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재계 리더 명단에 여섯 번째로 자신의 이름을 올려놓은 델 회장은 이처럼 놀라운 성장에 대해 “위대한 출발”이라고 정의내렸다. 컴퓨터 시장 점유율 세계 1위 기업을 브레이크 없이 초고속도로 이끌어온 그에겐 이 정도 성공이 위대하긴 하지만, 아직 출발에 불과한 것이다. 최승호 조선일보 국제부 기자(river@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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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쯤 엄마가 마이클 델의 이야기를 듣고서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도 컴퓨터 한 번 분해해 보렴."
당시에 computer programming을 막 시작했는 데,
내 생각에 컴퓨터는 Software적인 물건이라 Hardware를 많이 들여다 봐도 별 소용없었다.
델은 하드웨어 판매 업자지만 내 꿈은 프로그래머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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