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존재동사(être)의 이중 기능
* 단순한 연결어로서의 être동사
être동사는 태양은 붉다(le soleil est rouge) 소크라테스는 죽는다(Socrate est mortel)에서 처럼 고대 논리학자의 용어로 계사(couple)이며, 분류 논리학의 용어로는 속사(attribut) 또는 술어(prédicat)로서 주어 즉 실체(la substance)와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 절대 존재 긍정으로서의 être동사
다른 한편 être동사는 존재한다라는 절대적 의미로 쓰인다. 나는 존재한다 또는 태양은 존재한다고 말할 때(Je dis que je suis, ou que le soleil est), 여기서 être는 exister와 같다. 그러나 우리는 곧 l'être와 l'existance를 구별할 것이다.
2. 본질과 존재(essence et existence)
철학에서 현존(existence 존재)을 본질(essence)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사용한다. esse라는 라틴어 부정법은 프랑스로 부정법 être이다. 현존(existence)란 어떤 사물이 (현재) 존재한다를 의미하며, 본질(essence)이란 그 사물의 본성이 무엇인가? 즉 본질은 사물의 근본적 속성을 의미한다. 스콜라 철학자는 아리스토텔레스처럼 본질과 우연을 구별한다. 여기서 우연은 사물에 속할 수도 있고 안 속할 수도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성적이며, 노란둥이, 검둥이, 흰둥이는 우연적이다.)
3. 존재의 비환원성: 존재론적인 증명과 반박
* 본질로부터 연역된 존재
존재론적 증명은 안셀무스(Anselme 1033-1109)의 신존재 증명이며, 이 증명을 데카르트(Descartes 1596-1650)는 받아들이고 칸트(Kant 1724-1804)는 비판한다.
이 증명은 완전한 존재(être parfait)라고 정의된 신의 본질(essence)로부터 신의 현존(존재, existence)을 끌어낸다. 유한한 존재(être)의 본질은 - 신학자들이 말하는 피조물의 본질은 - 현존(existence)를 포함하지 않는다. 안셀무스와 데카르트는 신의 본질과 그 관념은 신의 현존을 포함한다. 데카르트는 모든 수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어떤 정의에서 출발하여 그 정의가 포함하는 결론을 연역한다. 신에 대한 관념(l'idée)은 완전한 존재(être parfait)에 대한 관념이다. 만일 신이 현존하지(exister) 않는다면, 신은 참으로 완전하지 못할 것이다. 즉 완전한 존재의 본질이 갖고있는 속성들 중에는 현존이 필연적으로 포함되고, 이 필연적 현존은 완전성인만큼 전적인 성질(qualité)이다.
* 본질로 환원될 수 없는 현존(existence)
칸트는 이 증명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현존이란 논증과 개념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에 따르면 현존은 속성이 아니며, 어떤 개념에 포함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완전한 존재(être parfait)에 대한 관념(l'idée)로부터 필연적으로 실재하는 존재(un être existant)에 대한 관념(l'idée)을 연역해 낼 수 없다. 칸트의 유명한 예, 실재하는 100원은 머리 속의 100원의 관념은 개념상으로 차이가 없다. 전자의 경우는 100원이 현존하고(exister), 머리 속의 100원은 현존하지 않는다. 현존은 어떤 경우에도 본질로부터 연역 될 수 없다. 신의 관념도 이 절대적인 규칙에서 예외가 되지 않는다. 가능적 100원의 관념에서 현재 하는 100원을 연역할 수 없듯이 신의 본질로부터 신의 현존을 이끌어 낼 수 없다. 칸트가 말하는 현존의 절대적 정립도 존재의 본질만큼 따로 인정해야된다. 그러나 안셀무스와 데카르트의 견해를 옹호할 수 있다: 완전한 존재(être parfait)에 대한 관념(l'idée)은 단순한 개념이 아니라 일종의 내면적인 경험이었다는 것을 인정함으로서 칸트를 논박할 수 있다. 그러나 칸트는 현존(existence)내에는 환원할 수도 연역할 수도 없는 비합리적이고 독창적인(original)인 것이 있다는 것만은 완전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여기서 잠시 주목하자. 존재론적 증명이 현존에 대한 내면적 경험이지 현존의 연역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는 수정된 견해에서 존재론적 증명은 존재(être)를 현존(existence)으로 바꾸면서 은연중에(자연스럽게) 외적 존재 개념의 본질과 내적 현존의 성질을 구분한다. 우리가 보기에 완전한 존재의 개념(외연, 기하적 개념)은 내적 현존의 개념(성질, 생명적 성질)과 다른 차원의 것이다. 현존의 개념으로부터 존재의 개념을 추론할 수 있다. 현존의 단면은 완전한 존재의 개념이다. 그러면, 단면은 영원하고 완전한 존재인가? 전체 연관에서 단면은 외연적으로 완전하고 영원한 한 세계이다. 결국 가장 완전하고 영원한 한 세계는 신이 창조한 한 단면의 세계이다. 이제 단면의 세계를 인간이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방식으로 흘러갈 때, 현존의 세계를 가능한 한 단면으로 여길 것인가? 결국 현존의 단면이 완전한 것이 아니라면, 현존에서 완전한 단면을 연역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러나 현존에서 완전한 존재를 추론할 수 있다는 것은 완전하고 영원한 단면을 추론하는 것이지, 그 존재의 가치를 추론하는 것은 아니다. 그 단면의 존재에는 가치가 없고, 그 단면들이 현존의 영원의 상으로 관념상으로 존재(être)할 뿐이다. 이 외연적 존재와 달리 피와 살을 가진 현존(existence)의 성질은 변한다. 이 현존에 가치를 보여하지만, 현존이 완전하고 영원한 방식으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단지 그 시점에서 최선일 뿐이다. 사실 최선인지도 모르고있고 모를 수도 있다. 그래서 인간이 더 이상 무엇을 해야하는 지를 모를 때, 메시아를 갈구하는 것이다. 메시아는 현존의 개념(현존의 작용하는 권능)이다. 그러나 종교는 메시아가 외적 관념과 존재의 개념이다. 현존은 우연성인데 비하여 존재는 인간이 어쩔 수 없이 만든 관념이다. 메시아에는 이중성이 있다. 한편으로는 현존에서 구체적 내적 경험으로 느끼고 또한 존재에서 표출되는 현존이다. 다른 한편 인간존재가 자기를 비하하지 않으려고 또는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지 않으려는 방식에서 인간이 만든 관념이다.
4. 존재의 수수께끼
* 잃어버린 존재와 되찾은 존재(être)
넓은 의미에서 현존(l'existence), 즉 존재(l'être)는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말인 동시에 가장 신비한 말이다. 사물의 현존(l'existence) 즉 하이덱거가 말하는 '존재자의 존재(l'être de l'etant)'에 대해 놀라기 보다, 일반인들은 사물의 본성(la nature) 또는 다수의 존재자들의 본질(l'essence de ces multiples étants)에 관심을 갖는다. 사유하는 것보다 생활하는 데 더 관심을 갖는 사람들은 이러한 신비를 무시한다. 빠스깔의 의미로 보면 사람들은 기분전환하고 있는 정도이다. 그러나 사물의 존재는 본질이전의 문제이다. 라이프니쯔는 "왜 아무 것도 없지 않고 어떤 것이 있는가?"라고 묻는다. 이에 대한 답으로 그는 세계가 신비적 현존은 이 세계의 창조주인 필연적인 신으로 귀착한다. 존재일반(l'etre en générale)의 근거와 근원은 이미 결정되어져있던 존재(un être déterminé)인 신일 것이며, 창조되지 않는 창조주는 모든 피조물의 이유일 것이다. 이 답변은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 문제를 바꾸어 놓는다. 즉 세계의 현존(l'existence)에 대한 해명을 신의 현존(l'existence)로 바꾸어 놓음으로서 여전히 현존을 수수께끼로 남긴다. 칸트는 존재론적 증명에 대한 비판을 하면서 신의 현존이라 할지라도 현존은 연역될 수 없다. 이에 비해 스피노자는 "삼각형의 특성은 삼각형의 정의로부터 나온다"고 말하듯이 세계의 모든 특성을 가진 이 세계는 신으로부터 나왔다. 신이 존재하느냐는 기자의 물음에 아인슈타인은 당신이 먼저 신이 무엇인지를 정의해 주면 그에 대한 대답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크리스트교인은 세계의 존재(l'être)와 나의 존재(l'être)는 어떤 정리(théorème)로부터 나온 결론이 아니라 은총의 결과라고 믿는다.
* 하이데거의 존재(l'être)와 사르트르의 존재(l'être)의 수수께끼(l'énigme).
사르트르의 존재(l'être)에 관하여 먼저보자.『구토(Nausée)』에서 존재(l'être)는 정당화되지 않는다. "모든 것은 무료(무상 gratuit)이다. 정원도 나무도 나 자신도. 이 점을 이해하기에 이르면, 당신의 가슴이 뛰고 모든 것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래서 존재(l'être)는 부조리(absurde)이다. 이 부조리는 논리적인 것으로 "존재자들(les existents)들은 나타나서 서로 만나나, 사람들은 이들을 연역할 수 없다." 인간의 감정과 삶의 희로애락에 관계없이, 결국 존재는 우리에게 무료(무상 gratuit)으로 나타난다. .
쇼펜하우어 경우에는 '존재(l'être)는 부조리(absurde)이다'는 것은 인생은 추잡하고 잔혹한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사르트르의 부조리는 쇼페하우어의 부조리가 아니다.
하이데거의 경우도 수수께끼는 여전하다. " 가슴이 기쁨으로 가득 차 있은 경우에도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왜냐하면 지금도 모든 것이 변하고 있고, 모든 것이 처음인 것처럼 우리 앞에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며, 마치 이것들의 현존(l'existence)보다는 이것들이 현존하지 않는 것(l'inexistence)을 이해하기가 더 쉬운 것 같은 방식으로 이것들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현존 그것은 있는 것 같지만 곧 사라져버리는 것으로 느낀다. 그러나 이 현존은 그래도 여전히 의미있다. 들뢰즈가 현존을 의미존재로 보는 경우는 이런 넓은 의미의 현존 즉 존재에 대한 수수께기에 대한 해명이다. 그래서 그는 존재의미의 파라독스르 의미논리라고 한다.
5. 존재(l'être)에서 실존(현존 l'existence)으로
* 실존(l'existence)과 존재(l'être)의 구별
이제 존재의 문제와 현존의 문제를 구별해보자.
문제제기로서 하이데거의 경우를 보자.
+ 하이데거 (Heidegger)는 자신을 실존(l'existence)의 철학자들과 구별하고 존재(l'être)의 철학자이기를 원한다. 실존주의자에서 실존이란 나의 실존이다. 사물은 존재하지만 실존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물은 즉자적으로(en soi) 존재하지만, 대자적으로(pour soi)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물은 나에 대해서(pour moi) 존재한다. 실존주의철학이란 실존하는 것은 나(je)이며, 나는 나의 의식에 따라서 우주를 실존하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합리주의 철학의 전통에서 인간의 지위를 보면,
- 데카르트 경우에, 실존하는 주체(자아)를 제1차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여기서 반성하는 자아(ego)는 보편적 자아이다.
- 빠스칼의 말 "무한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이라는 우주 속에 인간의 고독과 영원한 구원에 관심을 갖기 때문에 실존철학일 수 있다.
- 스피노자의 경우에, 인간을 우주와 관련시켜 설명하려는 경향이 있다.
- 헤겔의 경우에, 인간을 역사의 전체성과 관련시켜서 설명하려는 경향이 있다
- 플라톤의 경우 합리론과 실존철학을 함께 포함하고 있다. 합리주의 철학의 경향이란 철학에 지위를 인간자체에 보다 로고스에게 본질적 자리를 부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 실천철학의 의미란 그의 철학이 이론적 정립이라기보다 대화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고르기아스』에서 소크라테스와 칼리클레스는 서로 상반되는 생활을 하는 실존적 인물이다. 또한 소크라테스는 완성된 체계의 대변자가 아니라 자기자신에 대해 질문하는 실존적 사유인이다. 마지막으로 실존 특유의 문제와 시간성의 문제를 제시하는 신화를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시간이 있는 곳에는 이성의 체계(연역적 진리 체계)가 구축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래서 신화로 묘사한다. 신화는 기원의 문제(『티마이오스』에서 세계창조의 문제)와 궁극 목적의 문제(『폴리테이아』에서 저세상의 문제)를 설명하는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시간성과 역사성의 문제는 실존철학의 기본 관점이다.
+ 키에르케고르(1813-1855)와 실존철학이란,
키에르케고르는 실존철학자의 아버지라고 불리지만, 반철학자(antiphilosophe)이다. 그의 철학은 체계의 철학 특히 헤겔 철학에 반대해서 나왔으며, 어떤 철학적 체계로도 환원할 수 없는 개별성을 구비한 인간 주체의 실존에 관심에서 나왔다. 본질주의, 보편 철학은 주관적이고 특수하고 부분적인 실존적 실재를 이해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실존은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체험되는 것이다. 그에게서 신앙의 체험은 실존적 차원의 체험이며, 이성에 낯선 체험이다. 실존의 체험은 윤리적 체험과 다르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들을 희생시킬 준비가 되어 있는 종교적 희생의 체험개인의 자기반성은 아가멤논이 자기의 딸(이피제니)를 희생시킨 윤리적 희생사회적 반향에 대한 반성과 다르다. 아브라함에게 자식의 희생은 불합리이며 신과 인간이 관계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ineffable) 관계가 있다. 그러나 아가멤논은 신의 의지에 따라 행한 윤리적 영웅이며 그의 목적은 도덕적이고 애국적이다. 개인적 사건에 대한 행위가 아니라 일반적 의무에 대한 행위이다. 이 구분 자체가 모호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고 실존철학은 종교적인 것만은 아니다. 실존철학은 주관적 인간의 철학이고, 실존하는 주체의 철학이며, 세계내의 상황 속에 있는 즉 다른 사람과 관계 속에 있는 철학이다. 1945년 이후 1966년 구조주의가 휩쓸 때까지 프랑스에서 가장 성공을 거둔 사르트르(Jean-Paul Sartre)의 실존철학을 살펴보자.
6. 사르트르(Sartre 1905-1980)의 실존주의
1)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사르트르는 1946년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을 발간하면서, 제작된 사물의 현존(l'existence)과 다른 인간의 실존(현존, l'existence)을 다룬다. 사물은 현존 이전에 이미 사물의 사용에 관한 개념(관념)이 있으나, 인간의 인격에는 목적도 용도도 구성되어 있지 않다. 인간의 실존은 그래서 본질에 앞선다. 그는 이렇게 본질에 대한 실존의 우선에서 자유의 철학을 도출한다. 그래서 라이프니쯔의 합리적 신학에 반대한다. 라이프니쯔에 따르면, 신이 먼저 인간의 개념을 상상하였고 그 다음에 개념을 실현하였다. 그래서 구체적 실존은 본질의 전개일 일 뿐이다. 사르트르는 무신론자이지만 인간은 불가사의한 사랑행위 때문에 -그리스트교의 전통에 따르면 신의 무상(무료)의 자비 때문에 - 생겨난다고 한다. 인간이 스스로 타락할 수도 자신을 구제할 수도 있는 자유로운 피조물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실존주의는 (합리적)과학주의와 대립한다. 구조주의의 발흥은 실존주의에 대한 과학주의의 복수이다. 구조주의는 인간을 하나의 사물로서 설명한다.
실존주의적 사유는 사르트르 이전에도 있었다. 마르셀은 1925년 이래로 실존(existence)과 객관성(objectivité)을 구분한다. 사물인 대상은 문제(problème)를 구성한다. (그리이스어 pro-blema와 라틴어ob-jetum은 '내 앞에 던져진 것을 의미한다.) 나는 대상을 소유하지만, 나는 나 자신을 소유하지 못한다. 나와 나 자신과의 관계는 소유의 관계가 아니라 존재상황(situation d'être) 이다. 사물인 시계의 고장은 객관적 문제이지만, 나의 잘못은 문제(던져진것)이 아니라, 실존적 불가사의(mystère existentiel)이다. 인간의 죄를 탓하는 경우는 인간 실존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작용(대상에 대한 인간의 기술능력)을 객관화한 것이다.
2) 인간의 초월성
인간의 초월성이란 인간 실존의 환원 불가능성을 강조하는 말이다. 실존이 본질에 앞서기 때문에, 실존을 본성으로 환원될 수 없다. 인간의 초월성이란 실존의 고유성을 의미한다. 그러나 스피노자에서 인간은 '제국 속의 제국'이 아니며 자연의 일부분일 뿐이다. 사르트르는 스피노자의 결정론을 넘어서, 변증법적으로 대처한다. 사르트르에서 인간은 누구나 상황내에(en situstion) 있다. 이것은 모든 실존철학의 특성이다. 이 상황은 (우주 또는 세계의) 총체적 연관과 관련하여 설정된 것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상황이다. 결정론자나 본질론자에 따르면, 인간은 참을 수 없는 상황 속에 있기 때문에 항거한다(révolter)고 한다. 그러나 사르트르에 따르면, 어떤 상황도 그 자체 참을 수 없는 상황은 없으며, 그 상황에 항거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실존적 투영이다. 그래서 어떤 상황이든지 간에 그 상황을 나 자신의 자유의 계기로 만들고 있다. 심지어 사르트르는 "우리는 독일 점령 하에서보다 더 자유로워 본적이 없다"라고 1945년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여기는 오해의 소지가 많다. 마치 감옥에 있는 자가 자신의 항거를 체념하고 자유롭게 상상의 나래를 펼 때, '이 세상에서 감옥에서 더 자유로워 본적이 없다."고 말하는 오류를 범할 것이다.
그런데, 실존의 의미는 키에르케고르에서 더 분명하다. 실존자는 여러 상황에서 하나만을 선택해야하는데, 그 선택에서 실존자는 세계라는 무대 위에서 천상천하 유아독존처럼 제일인자라는 역할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사르트르가 말하는'실존'의 의미는 어떤 억압적이고 비극적 상황에서 선택은 더 절박한 것이다. 그래서 초월(transcendance)이란 미래 계획을 따라서 현재 상황을 넘어서는 것을 의미한다. 상황을 넘어서는 것 즉 현재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에로 이행이 곧 초월이다. 빠스갈의 말처럼 인간은 "배를 타고"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선택은 불가피하다. 심지어 아무 것도 선택하지 않는 것도 하나의 결정이며,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책임을 추궁 당할 수 있다. 그래서 '실존한다(exister)'는 본질적으로 운명이 되는 '존재한다(être)'와 반대이다. 실존은 미래를 새롭게 하는 것인데, 존재는 과거가 되어 응고되고 닫혀진 존재가 됨을 의미한다. 결국 존재는 과거로 옮겨진 실존이다. 헤겔은 이것을 "존재란 과거에 있었던 것이다(Wesen ist was gewesen ist)"라고 표현한 것과 같다.
사르트르는 『닫혀진 문(Huis-clos, 1944)』의 주인공들은 지옥 속에 존재하면서 자기들의 과거의 인생에 대해서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이들 중의 한 사람의 말 "너는 네 인생 이외의 다른 어떤 것도 아니다" (이 말은 실존주의의 유명한 공식중의 하나이다) - 네가 살아온 업보는 바로 너이다. 이때 업보는 존재이지 실존이 아니다. 업보를 넘어서는(transcendant)것이 실존이다. 모든 실존자는 끊임없는 초월자이다. 니체의 영구회귀에 대한 재해석에서 끊임없이 과거에서 벗어남도 같은 의미의 초월이다. 이는 생명(인간 의식)의 불가역성의 반복, 즉 역사의 환원불가능의 반복을 의미한다. 이 말은 내가 실존하고 있을 때 나의 자유이고, 내가 죽었을 때 나의 본질과 운명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내가 죽으면, 실존은 끝나고 존재가 된다. 나의 살아온 인생은 이미 만들어진 역사이고, 나 이후를 사는 사람들에게 제공되는 역사이다. "죽었다는 것, 그것은 산자의 먹이이다. (Etre mort, c'est être en proie aux vivants)"
3) 실존자에게는 본성(nature)이 없다. - 무의식의 부정
* 나는 나의 현재의 것(ce que je suis)이 아니다.
실존자는 상황 속에 있지만, 어떠한 상황 속에 있든지 간에 그 상황으로부터 자유롭다. 그 상황이 주어진 사회 경제적 요건이 어느 정도 갖추어졌을 경우에 가능하다. 가로디가 말한 자유로운 실업자는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실존자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유롭다. 인간은 실존자(existant)이기 때문에 본성(nature)을 갖지 않는다. 사물은 본성을 지니고 있으며, 즉자적으로(en soi) 존재한다. 이 사물은 내부(dedans)도 없고 가능(possible)도 없다. 그러나 인간은 실존을 의식하며, 대자적으로(pour soi) 실존한다. 실존한다는 ex-ister는 "-에서 나간다"를 뜻한다. 실존자는 (존재의) 본성의 포로가 아니며, 인생의 조건과 숙명에서 벗어난다. 실존주의(ex-istentialisme: 떠나가는 주의)는 "나는 언제라도 떠날 수 있다!"를 의미한다. 실존하는 대자존재는 자기자신과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 존재이며, 자기인 것이 될 수 없는 존재로 선고받았다는 것을 자각하는 존재이다. 사물 존재 즉 즉자 존재는 자기인 것으로 존재하며, 실존자 즉 대자 존재는 항상 자기 아닌 것으로 존재한다.
* 본질적인 신화에 대한 거부
비트겐슈타인 본질주의의 종언에서 마찬가지로 즉자 존재에 대한 논의는 이미 끝났다. 그러나 대자 존재에 대한 논의는 그 다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대자존재 때문에 존재론은 불가사의에 묻혀 있었다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내가 맡은 배역이 있다. 나의 배역을 자기기만(mauvaise foi)하지 않고서 성실하게 맡을 수 없다. 왜냐하면, 나는 이 배역을 연출하는 사람이지 배역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르트르가 치사한 놈(le salaud)이라 부르는 사람은 실존하기를 잊어버리고 어떤 본질적인 우월성을 바라는 자들로서 자기기만하는 자이다. 이 자기기만자는 사회적 지위를 본질적 우월성으로 착각하여 뻔뻔스럽게 행위하는 자들의 경우에서 볼 수 있다. 남자가 여자보다 우월하다고, 백인이 흑인을 지배한다고 단언하는 자들이다.
『존재와 무(L'Etre et le Néant, 1943)』에서 표현된 "명랑한 몸짓으로 다가와서 약간은 지나치게 정중한 모습으로 허리를 굽히는" 자동인형같이 행동하는 카페의 종업원에게서 희극을 연출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유태인 문제(la Qustion Juive, 1946)』에서 '유대적인 본질'은 없으며, 유태인들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존재를 실존'시켜야 한다.
『코메디언이며 순교자인 성인 쟝 즈네(Saint Genet comédien et martyr, 1952)』에서 '너는 건달이다'라고 명명된 소년은 사회가 그에게 맡긴 악인의 역할을 담당하는 길외에는 다른 자유를 알지 못한다.
『말(les mots, 1964)』에서는 '하느님 아버지를 닮은' 위엄있는 할아버지 앞에서 어린 쟝폴이 모범 소년의 역을 맡은 코메디를 어떻게 연출하는 가를 이야기한다.
보봐르(Simone de Beauvoir, 1908-1986)도 『제 2의 성(Le deuxième Sexe 1949)』에서 여성은 떠나고 있다(ex-ister)는 것, 즉 실존한다는 것 또 선천적으로는 여성적인 본질도 영원히 여성적인 것도 없다는 것을 말한다.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란 흑인의 유치함이나 유대인의 음흉함에 대한 신화와 같은 차원의 본질론자의 신화이다.
실존주의에서 인간은 본질도 본성도 없다. 우리는 의식적 실존자이다. 의식은 모든 재료를 대상으로 삼으면서 재료를 초월하며, 재료를 무화 시킨다. 여기서 무(néant)란 인간은 자기자신과 불일치 즉 자기자신인 것과 분리를 의미한다. 말하자면, 나의 의식은 나의 의식이 대상으로 제시하는 이 자아의 특수성(대상성)들을 무화시키고(néantiser) 초월한다. 의식의 표시인 무(néant)에 의하여 즉 무(rien)에 의하여 나는 나 자신으로부터 분리되고 있다. 이점에서 사르트르는 전통적인 관념론(데카르트나 칸트의 관념론), 사유주체의 사유대상에 대한 상대성, 사유의 우월성 등고 일치한다. 그래서 알랑(Alain)은 "의식이란 모든 것을 거슬러 올라가는 오만함이며, 모든 사물에게 사유의 존재를 부여하는 부정이다"고 한다.
실존주의에서는 실존하는 인간에게 심리학적인 무의식은 없다. 실존한다는 것은 의식이 실존한다는 것을 의식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심리학에서 말하는 의식에 내재하는 의식의 강도도 정도도 없으나 여러 가지 지향성을 띠고 있다. 기절, 감정의 극한, 의식을 잃는 것 등도 인간의 책략(ruse)이며 위험을 없애기 위한 마술적 수단(procédé magique)의 선택이다. 위험을 객관적으로(합리적으로) 제거하는 대신에, 나는(의식은) 주관적으로(마술적으로)제거한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콤플렉스란 어린 시절에 환경에 따라서 내 속에 형성된 것이 아니라, 내가 선택한 것이다. 즉 내가 내성적이고 불안하고 공포심이 많은 것은 내의 책략 또는 마술적 수단의 선택이다. 그래서 사르트르는 무의식을 부정하면서, 무의식은 나의 의식의 자기기만이다고 한다. 사르트르의 무의식의 부정은 자의식의 책략이라 점에서 의미 있다. 그러나 자의식이 자아의 통제를 받지 않는 장면(꿈 또는 주위에 보호자도 아무도 없는 순간의 환자의 상태)에서 생기는 평소와 다른 행위에 대해서 자기기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즉 실수행위가 의미있다고 할 때 이것은 자기기만이 아니라 자기 성실성의 표현이 아닐까?
4) 역사적 실존: 사르트르와 마르크시즘
사르트르에서 초기 실존주의와 전투적 마르크스주의와 관계는 어떤가? 그의 두 저술『존재와 무(L'Etre et le Néant, 1943)』과 『변증법적 이성비판(La critique de la Raison Dialectique, 1960)』이 양립하는가? 사르트르는 우선 변증법적 유물론(엥겔스 이론)을 거부하고, 사적 유물론(인간의 역사는 변증법적인 관계에 따라서 설명된다는 이론)에는 찬성한다. 그런데 『존재와 무』에서 인간은 항상 자유롭다는 관념론적 자유론과 『변증법적 이성비판』에서 봉건적이고 자본주의적 사회에서 인간은 철저하게 소외되고 산업생산의 증대에 의한 혁명에 의해서만 인간이 해방될 수 있다는 주장은 양립할 수 있는가? 전자에서 개개인의 실존을 연구한다면, 후자에서는 집단적인 실존을 연구하였다. 개개인의 자유로운 실천이 집단(총체)의 삶에 역행하는 상황이 많다. 예를 들면 중국에서 개개인이 경작면적을 늘리기 위하여 나무를 벤 것이 나무없는 나라에서 홍수가 난다. 이런 개인들이 원하지 않는 재앙 때문에 개인은 소외(aliénation)된다. 이 소외는 개인의 자유가 함몰되는 함정이다(19세기 노동자들은 자유의사에 따라서 임금인하를 수용하였다)고 보았다. 계급투쟁에서는 집단(혁명적 노동자들)은 소외된 단편적인 자유들을 회복하며 또 효과적으로 참여한다고 한다. 오드리(Colette Audry)는 『사르트르와 인간적 현실』에서 "사르트르의 철학사상은 그의 저서 전체를 통해서 훌륭한 통일성과 불변성을 갖고 있다. 즉 의식은 사물이 아니라는 것, 인간 실존의 특징은 자신의 목적을 향해서 항상 자기 자신을 넘어서고 있다는 것, ... 주장한다. ... 역사는 인간의 자유가 회복되는 장이며, 혁명적인 실천으로 자기주장을 하는 장이다. 사르트르의 마르크시즘에는 근본적으로 자신의 실존주의였던 것 즉 휴머니즘이 남아 있다."고 평가한다.
*부록: 반실존주의: 현대 구조주의
구조주의는 실존주의(의식의 역할, 역사의 중요성, 인간의 초월성)를 거부하면서 나온 것으로 철학 학파를 구성하는 것은 아니다. 도메나흐(Domenach)는 인류학자 레비 스트로스, 정신분석가 라깡, 마르크스 철학자 알튀세르, 인식론의 철학자 푸꼬를 말하면서, 이들의 다양한 시도는 문제도 다르며, 문제 취급하는 방향도 다르다고 한다.
1) 구조주의와 형식주의
구조주의는 과학적 논리학의 정신과 언어학의 정신에 따라서 철학적 문제를 다룬다. 비트겐슈타인(1889-1951)의 『논리철학논고(1921)』에서 논리는 "세계의 건축술"이라 말한다. 논리는 명제들의 체험적 의미를 괄호에 넣고, 명제들의 형식과 구조에 관심을 갖는다.
2) 구조주의와 언어학
언어학과 관련하여, 구조라는 말은 소쒸르(Saussure 1857-1913)의 『일반언어학 강의(Cours de Linguistique Générale, 1916)』에서부터 이나 1928년 헤이그에서 열린 <제1회 국제 언어학회>이후이다. 소쉬르는 형식 체계인 랑그와 개인의 실제적인 언어인 파롤을 구분한다. 언어는 서로 관련되어 있는 기호들의 체계이며, 기호들은 기표(signifiant, 표현)과 기의(signifié, 내용)로 이루어져있다. 단어들에는 음소들(phonèmes)에게서와 마찬가지로 미분적 정의(definition différentielle)가 있다. (단어 대위는 중위와 소위와 대립에서 의미를 갖는다. 음소t와 음소b의 구별은 tête(머리)와 bête(짐승)을 구별한다.)
3) 언어학적 모델의 풍요성
언어학을 모델로 사회형태, 문학작품, 요리법 등을 효과적으로 연구할 수 있다. 구조주의 인간은 "명확하게 표현되는 경우도 있고 또 명확하게 표현되지 않는 경우도 있는 자기 빠롤이나 문장의 총체"이다. 레비 스트로스는 어떤 사회를 그 사회의 신화 즉 그 사회의 빠롤을 통하여 정의한다. 그리고 사회는 하나의 교환체계이며, 교환되는 것들의 성질이 무엇이든지 간에 체계의 형식구조를 탐구할 수 있다. 따라서 구조의 연구는 의미론보다 통사론에 있다.
4) 구조주의의 세가지 방향
구조주의에는 실존주의의 방향과 반대되는 세가지 근본방향이 있다.
a) 푸꼬의 "체계에 대한 정열"은 역사의 중요성을 감소시킨다. 체계즉 구조는 공시적 관점에 속한다. 역사는 어떤 체계의 변질이며, 시대에 따른 문명들은 불연속이다. 그래서 각 시대는 그 시대 특유의 정신구조의 표시가 새겨져있다. 그래서 사르트르는 "실천을 도입하려면 역사를 도입하지 않으면 안되며 푸꼬는 바로 이것을 거부한다."고 평가한다.
b) 사르트르는 무의식의 존재를 부인하지만 구조주의는 무의식의 실재성을 강조한다. 그래서 구조주의 방법은 문화와 제도가 던져주는 애매한(비밀스런) 메시지를 해독하고자한다. 여기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의 영향을 말할 수 있다. 라깡은 소쉬르와 정신분석학을 결합하여, 신경증의 증상을 억압되어 있는 기호내용(기의, signifié)을 찾아내야하는 수수께끼같은 기호표현(기표, signifiant)이라 보았다. 즉 신경증 증상은 "언어구조와 동일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꿈의 전위현상(deplacément, 꿈에서 억압대상의 많은 부분은 한 부분으로 숨겨져서 의미를 갖게되고 이 부분만이 꿈의 표면에 나타나는 현상)은 환유(métonymie)와 동일하다. 그런데 의식의 심층에 있는 무의식은 "문법도 통사법도 모르는 주체의 담론이다"
c) 무의식의 역할을 이런 식으로 인정하면 새로운 철학의 가장 중요한 테마는 반인간 주의(anti-humanisme)가 될 것이다. 인간주체의 행위인 빠롤은 이차적이고, 중요한 것은 랑그 즉 모든 빠롤을 기초하는(초월하는) 비인칭적 체계가 된다. 라깡이 말한 "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하고,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 존재한다"와 같이, 나를 결정하는 것은 무의식이다. 이런 경우에 인간은 언어의 장(le lieu du langage)일 뿐이고 구조의 산물일 뿐이다. 어쩌면 인간은 이미 어떤 위상(신의 영역) 속에서 우러나오는 비밀을 표현하는 여러 도구 중에 한 도구인지 모른다. 생명은 우리의 기술의 범위를 넘어서 우리의 의식을 이루는 장(위상)이다. 인간은 '제국속의 제국'의 자유 또는 이성을 누릴 수 있다는 환상을 버려야할 것이다. -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본질주의에 종언을 고했다. 푸꼬는 '인간의 죽음'을 선언하면서 개인적 인격의 허구를 말하고자 한 것인가? - 사회 개혁 또는 혁명에는 꿈의 소원성취와 같은 무의식의 자기성취(메시아)를 요청한다.
5) 실존주의와 구조주의 대립은 사르트르의 마르크시즘과 알뛰세르의 마르크시즘이 대립하는 모순개념들 속에 잘 나타난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세계에 자기를 투영하고 세계를 변혁시키고 역사를 만드는 것은 인간이다. 그러나 알튀세르에 의하면 마르크시즘은 반인간주의(anti-humanisme)이며, 마르크시즘의 인간은 구조의 산물이다. 계급투쟁은 역사의 어떤 시기에 있는 어떤 사회 특유의 생산관계를 구성하는 여러 가지의 관계들, 차이들, 대립들 등으로 이루어진 체계의 반영이다. 따라서 참된주체는 구체적인 인간이 아니라, 지위와 기능을 정의하고 분배하는 생산관계이다. 뒤프렌느(Dufrenne)는 결론을 내린다 "따라서 생산관계를 인간관계라고 생각하지 말자. 체계를 구성하고 움직이는 것은 관계를 표현하는 명제들이며, 인간은 명제 함수의 변수에 지나지 않는다."
참조 1)
구조주의자들은 실존주의의 여러 가지 관념들을 거부한다. 즉 구조주의는 합리론을 거부하는 실존주의를 거부하고, 인간의 자유는 모든 원인(cause)과 본질(essence)을 초
월한다는 실존주의의 선언에 반대한다. 구조주의는 합리론으로의 회귀이며, 논리적 구조로의 회귀이다. 인간은 모든 논리와 투쟁할 수 있는 초월적인 지배자가 아니다. 그래서 인간은 지식의 단순한 대상이 되어야 한다. 인간의 본질(자기자신도 의식하지 않는)은 해독 될 수 있다. 특히 인간 언어구도를 통해서 해독 될 수 있다.
[이런 사유방식은 이미 사라졌다. 구조는 인간의 지성의 산물이다. 인간은 구조에 의해 해명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능력의 발현에 의해서 의미체로서 나타나고 실현된다. 이 의미 실현체에서 그 내용은 언어의 구도로서 해독되고 설명(이해)되기보다, 의미 연관의 관계방식과 위상에 의하여 설명(이해)되고 실행된다. 실행이 없는 경우에는 내용은 아직도 정해지지 않은 '개념 없는 개념의 상태' 즉 '구조없는 실재성(desconstruction)'으로 있다. 이 내용이 규정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로 혼융의 내용(속성 실체)를 형상논자처럼 형상에 내용이 등질적으로 보거나 내용 없는 혼돈의 상태로 보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이 내용이 너무나 활발하여 규정될 수 없다는 것 때문에 이름 지울 수 없다(개념 없이)고 말할 수는 있으나, 없는 것(無(무))도 아니고, 하찮은 것으로 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 버린다는 생각이 얼마나 실체의 본성을 왜곡했는지를 지적하기 위해서도 질료의 자기운동에서 출발하는 사유가있음을 강조해야 한다. 이 자기움직임의 한 모습이 형상이 된다.
참조 2)
'1966년은 프랑스에서 구조주의 운동이 승리한 해이다'라고 카트린 클레망(Catherine Clement)은 말했다. 이 승리는 실존주의에 대한 반발을 의미한다. 그 해는 라깡의 『글쓰기(Ecrit)』, 푸꼬의 『말과 사물(Les Mots et les choses)』, 바르트의『비평과 진실(Critique et Verite)』, 토도로프의 『문학의 이론(Theorie de la Litteratur)』, 마슈레이의『문학생산의 이론을 위하여(Pour une theorie de la production littraire)』등이 출간되었고, 어려운 라깡의 책과 푸꼬의 책이 폭발적 성공을 했다는 것이 더욱 놀라운 해이다. 그래서 르노 마티뇽(Renaud Matignon)은 이들 젊은 작자들을 "1966년의 아이들"이라 칭하고, 프랑스와 도스(Francois Dosse)는 그의 저작 『구조주의의 역사(Histoire du Structuralisme)에서 1966년을 '계몽의 해(l'annee lumiere)'라 부른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의 흐름을 건너가는 이성적이고 합리주의적인 구조주의를 신계몽의 시대라고 할까? 그러나 구조주의는 이미 있었다. 레비 스트로스(Claude Levi-Strauss)는 프랑스에서 진정한 구조주의자는 언어학자 방브니스트(Benveniste), 신화학자 뒤메질(Dumezil) 민속학자 레비 스트로스 자신이라고 한다. 이들 전기 구조주의자들은 설핏보아, 사유체계의 틀과 관련 없는 것으로 보이는 신화, 민담, 민속, 원시적 생활, 평범한 대화 등에도 어떤 틀이 있다 것을 보았고, 그 구조들 사이에서 약간의 차별성을 갖는다하더라도 의미를 연관 지우는 근본적 하부 토대에는 보편적이라고는 말하지 못하더라도 일반적이라고 할 수 있는 골격(구조)이 있다는 것을 보았다. 이런 생각이 현존(또는 실존)을 근원적 토대 없이도 존재로서 정립하려는 실존주의자의 실존적 한계 상황의 숨막히는 폐쇄회로를 넘어서는 활로를 개척하게 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구조주의는 또한 그 태생에서 인간 현존(실존)의 참을 수 없는 모호성(부조리)에 대한 인간 우월성을 다시 확립하려는 인간 중심주의적 인식태도를 내재하고 있었다. 전기 구조주의의 일반성은 인간의 소박한 관념적 틀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구조주의자들은 이 틀(구조) 또는 인간이 생산하는 틀의 일반성을 탐구한다. 1966년의 세대(차기 구조주의자들)들이 탐구한 구조라는 것은 시대적 (인식적) 합의 정도의 것이지 인간의 보편적 능력의 확장이 아니라는 것이다. 되돌이켜 보면, 결국 실존자로서 인간이란 것도, 데카르트의 에고(Ego)가 개별적 자아가 아니듯이, 개별적 인격의 특수 상황에서 자아가 아니라 그 사회와 제도가 은연중에 만들어낸 일반적 자아임을 부정할 수 없는 것이 실존주의가 남긴 유산이다.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차기구조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견해가 또 한번 소박한 관념론의 틀 속에 빠져 들어가는 것을 경계하면서, 자신들이 구조주의자의 일원으로 또는 그 범주 속에 분류하는 것을 꺼리면서 구조주의 없는 구조주의 시대(즉 후기 구조주의 시대)에로 이행하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