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한석 (컬럼니스트) |
2004/12/09 |
필자와 교류가 있는 몇몇 프로젝트 매니저들은 필자와 만나면, 자신이 맡고 있는 프로젝트의 팀원들과 그들의 과중한 업무에 대해 종종 얘기한다. 그 얘기를 듣고 있자면, 마치 프로젝트란 것이 팀원들의 희생과 불행을 거름으로 성장하는 생물과 같이 생각될 정도이다.
회의실에서 협력 업체와 비용에 대한 협상을 하던 중 갑자기 쓰러져 병원에 실려간 어떤 팀원 얘기가 떠오른다. 그 사람은 과로 및 영양실조 진단을 받고서 몇 개월간 요양을 해야 했다. 또 다른 팀원은 6개월여의 개발 기간 동안, 일주일에 휴일 포함 100시간 가까이 사무실에서 일을 했기 때문에 이혼을 당하게 되었다.
또한 과중한 업무 및 정치적 압박감으로 인해 며칠 동안 잠수(업계에서 흔히 쓰이는 용어)했던 한 팀원이 다시 사무실에 출근한 후, 동료와 서로 (실제로 몸싸움으로서의) 난투극을 벌인 사건에 대해서 들은 적도 있다. 어떤 한 팀원은 업무에 환멸을 느낀 나머지, 실제로 불가(佛家)에 귀의했다고 한다. 지병을 얻었거나, 애인과 헤어진 경우는 그리 놀라운 축에 끼지도 못한다. 독자들 또한 직간접적으로 경험하거나 보고 들은 몇몇 사례들을 알고 있을 것이다.
엄청난 압박감에 시달리는 중대한 프로젝트에서 사람들이 정신적 또는 신체적으로 고통 받는 사례는 비일비재하다. 그러한 프로젝트 팀의 작업 공간에 방문해보면, 우리는 그것을 곧바로 눈치챌 수 있다. 며칠째 갈아입지 못하여 지저분한 옷 매무새, 어질러진 커피 잔들, 그리고 다양한 종류의 약들이 그들의 책상 위 어딘가에 놓여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프로젝트 매니저가 언젠가 이런 얘기를 했다.
“일에 있어, 개인의 행복은 결코 좋은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불행할수록 일을 열심히 한다.”
그러한 관점을 가진 프로젝트 매니저가 업계에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물론 이것을 굳이 프로젝트 매니저에 국한하여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들은 격려자, 문제 해결자, 리더로서의 역할이 아닌, 감시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팀원들이 사생활을 희생하고, 건강을 잃고, 거의 모든 시간을 프로젝트에 투여하는 것을 보면서, 일이 잘 되어가고 있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이다.
더 나쁜 사실은 그것에 부합하는 일중독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일중독증이란 정신과적인 병명은 아니며, 사전적인 의미로는 ‘오직 일만이 정신적으로 지탱할 힘이 되는 상태’를 뜻한다. 그렇지만 사실은 업적이 좋은 일중독자들이 간혹 있을 뿐, 대개는 업적이 좋지 않아 일중독의 정당성조차 부여할 수 없는 사람들도 많다. 자발적이고 적극적 일중독자들도 있지만, 일에 대해 거절을 못하기 때문에 계속 일을 하게 되는, 즉 스스로는 인정하지 않을 지라도 사실상의 일중독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
오버타임의 본질을 생각해보자. 순간적인 집중력 발휘를 위한 단기적인 오버타임 외에 모든 오버타임은 사실상 가치가 없다. 사람들은 할 일이 적을수록, 그것을 더 천천히 한다. 그래서 야근을 고려하여, 모든 업무가 그것에 맞추어져 이루어지게 된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지적인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는 투여 시간의 물리적 한계가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 자신이 없었으면 생기지 않았을 일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먼저 처리하며, 타인에게도 강요한다. 또한 형편없는 일을 많이 참을수록, 그런 일들은 계속 더 많이 주어지게 된다. 이것이 바로 형편없는 일을 감내하는 사람에 작용하는 법칙이다. 이번 한번뿐인 일은 없는 것이다.
물론 소프트웨어 프로젝트는 거의 언제나 비합리적인 데드라인, 부족한 예산, 비전문적인 인적 자원을 바탕으로, 착수 시점부터 상당한 문제점과 위험을 안고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이 바로 여타의 일반적인 그리고 정상적인 업무들과 확연히 구분되는 점이며, 사람들이 어떻게든 프로젝트를 성공시키기 위해 희생을 감수하는 배경이기도 하다. 하지만 비정상적인 생활은 점차 반복될수록, 그것이 마치 정상적인 생활인 것처럼 되어 버린다.
나쁜 관점을 가진 프로젝트 매니저와 비생산적인 일중독자들이 결합하면 어떤 일이 생길까? 무엇인가에 몰두하는 듯 보이고 거의 모든 시간을 업무에 투여하고 있는 듯 보일지라도, 그러한 프로젝트에는 어떤 기쁨도 없으며 활기도 없다. 필자 식의 표현에 의하면, 음습(陰濕)한 기운만이 프로젝트에 가득 차 있는 것이다.
팀원들의 희생과 불행을 바탕으로 하여 프로젝트의 성공을 가져오려는 그러한 노력들은 궁극적으로 프로젝트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결코 프로젝트의 성공을 가져오지 못하며, 오히려 프로젝트의 실패를 가져올 것이다.
왜냐하면 프로젝트의 결과물은 산출물로서의 최종적인 제품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중요 이해관계자들의 만족도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만일 팀원들이 기쁘지 않다면, 그들이 어떻게 고객들을 기쁘게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팀원들이 불행하다면 고객들은 결코 행복할 수 없으며, 결국 팀원들의 불행이 고객에게 어떤 식으로든 전염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필자가 표현하는 ‘프로젝트의 음습한(그늘지고 음산하고 축축한) 기운’이다. 실패한 프로젝트의 경력자라면 그 느낌을 경험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대개의 소프트웨어 프로젝트들이 처해있는 열악한 환경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팀원들의 희생과 불행을 담보로 한 프로젝트의 진행에는 반대하는 입장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희생의 강요를 통하여 어떻게든 일자를 맞출 수는 있겠지만, 결코 좋은 품질의 제품을 얻고 고객을 만족시킬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프로젝트의 완성’과는 거리가 먼 일이다. 단지 완성된 것처럼 보일 뿐이다.
이에 대해서는 상당한 논란이 있을 수 있겠지만, 필자는 프로젝트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가 ‘피플웨어(peopleware)’이고 또한 그들의 만족도를 관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들이 만족하고 기뻐하고 행복하지 않은 프로젝트의 표면적인 성공을 믿지 않는다. 이것은 나름대로 상당한 시행착오와 반성을 통하여 가슴 절절히 깨달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프로젝트의 성공을 꿈꾸는 프로젝트 매니저라면, 피플웨어의 (단지 표면적이고 선언적인 것이 아닌) 실질적인 중요성을 인식해야 하고 그들을 케어하는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어떤 이유에서건 피플웨어를 홀대한다면, 그리고 인적 자원 스스로가 피플웨어임을 자각하지 못한다면, 언젠가 반드시 그것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인류의 모든 역사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http://www.zdnet.co.kr/news/column/hsryu/0,39024724,39132115,00.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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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개발자들이 조선시대 소리하는 사람 같기도 하다.
한을 품게 만들어서 소리에 전념할 수 있게, 고통을 줘서 한 맺힌 목소리로 노래하는 사람말이다.
파리넬리 같기도 하다. 거세해서 다른 건 못하게 하고 노래에만 전념하게 만든다.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면서 예술에만 힘쓰고 자신을 희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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