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낭만파)의 상반된 예술관을 갖고 대립한 위대했던 독일인 작곡가 브람스와 바그너.
예술의 시대적 혁신을 화두로 삼았던 독일 민족주의자 바그너와 인류 보편의 예술을 추구했던 브람스. 그러나 두 사람은 정반대의 존재였다. 바그너는 혁명적이고 미래지향적인 데 반해, 브람스는 (신)고전파였고 추상적 형식을 주로 다루었기에 오페라는 물론이고 표제음악조차 쓰지 않았다.
* 바그너(Wagner 1813∼1883)와 브람스(Brahms 1833∼1897)는 같은 독일사람이나 그 작풍이 매우 대조적이다. 바그너가 독일적인데 대해 브람스는 보다 헝가리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바그너가 극적인데 비하여 브람스는 서정적이다. 바그너가 진보적이라면 브람스는 보수적이었다. 그 당시 「바그네리즘」이란 선풍이 국내작곡가에게는 물론 전세계의 악단을 휩쓸고 있을 때에 그의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은 브람스뿐이었다고 역사가들은 기록하고 있으나 이것은 매우 과장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그는 바그너와는 반대로 오페라를 작곡하지 않았으며 실내악곡을 주로 썼던 것이며 절대음악의 길로만 매진했던 것뿐이다.
바그너는 작곡기법상으로 당대와 후세에 큰 영향을 주었고 반면에 브람스는 주옥같은 작품만을 남겨 놓았다고 말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 근대 오페라 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로 일컫어지는 <바그너>(Wihelm Richard Wagner, 1813~1883)는 이러한 낭만주의적 기운에서 태어난 인물이다. 그는 오페라가 오락물로 전락한 것을 비판하며, 문화개혁을- 특히 독일정신의 회복을-이룰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오페라를 연구하였다. 기존 체제의 전복을 목적으로 정치적 혁명에 가담했을 정도로 강한 이념을 가진 그는 그의 새로운 <종합예술작품>(Gesamtkunstwerk)에 대한 개념과 이것의 실제적 적용인 <음악극>(Musikdrama)을 통해 그것을 반영하고자 했다. 그 개념과 음악극에 쓰인 기법들은 특히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의 음악가 뿐만 아니라 다른 예술가들의 창작에 많은 영향을 주었고, 이러한 영향력은 그의 이념과 작품에 대한 논란과 함께 그 이후에도 계속된다.
독일의 오페라는 바그너에 의하여 새로운 형태를 얻게 되었는데, 그 새로운 형식을 일반 오페라와 구별할 때 이렇게 부른다. 바그너는 종래의 오페라형식에 반대하여 '전체예술작품'을 제창하고, 오페라는 단순히 음악·연극·조형예술 등을 모아놓은 것이 아니라 드라마를 실현하는 데 있어 다른 모든 예술이 이를 거들어주어야 하며 그 것이 참된 예술이라 하였다. 이 때문에 대본의 가치가 존중되고 극적 내용이 강한 것, 고도의 사상성을 가진 것이 선택되었다. 또 종래의 아리아 편중의 번호오페라의 방법을 버리고 음악 전체가 단락감을 피해 무한히 계속되는 무한선율양식이 채택되었다.
그리고 라이트모티프[시도동기]가 쓰이는 것이 특징이며 이것은 음악적 동기를 단어와 같이 일정한 의미를 갖게 한 것으로, 이로 인하여 음악이 항상 극의 발전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진행된다. 이 밖에 가곡풍의 멜로디나 레치타티보는 배제되고 대사의 억양을 음악의 흐름 속에 이입시키는 방법에 의해 음악적 표현능력과 언어를 융합시키려고 하였다. 또 관현악의 표현 범위도 확대되고 편성도 커지는 경향이 있다. 바그너 이후, R.슈트라우스나 H.피츠너의 오페라도 이렇게 불리는 일이 많다.
* 브람스는 바그너(Richard Wagner)와 더불어 후기 낭만파의 커다란 흔적을 남기는데 일익을 담당한다. 바그너가 사회 운동가로서 사회개혁을 통하여 정치에 참여하기도 하고 스위스에서의 망명생활을 거치기도 하며 평론가로서도 이름을 널리 떨쳤는데 반하여, 브람스는 순수한 음악가로서 자신의 일만 묵묵히 수행하여 왔다. 브람스를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이후의 힘의 음악가, 열정의 음악가라 표현하는 것도 자신의 일생을 외고집으로 주장하며 소일한 것에 비추어 이야기 할 수도 있겠다.
흔히 후기 낭만파에 있어서 바그너와 자주 비교가 되는 것은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또한 두 사람은 후기 낭만파의 양대 거봉이었던 만큼 개성도 뚜렷하였기 때문에 그들을 따르는 추종자들에게 서로 상대방을 얕잡아 보는 풍조가 성행하였다고 하는데, 심지어는 브람스의 제자들이 식당에 앉아 있을 때 바그너 추종자들이 식사를 하러 들어오면 서로 쳐다보지도 않고 식당을 박차고 일어나 나갔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낭만주의도 익을 대로 익어갔던 시기였던만큼 바그너파는 브람스를 가리켜“시대의 조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태고의 유물”이라고 혹평했다. 나이 40이 지나 교향곡을 쓰기 시작한 브람스를 보고 바그너는“교향곡은 베토벤에서 다 끝났는데 무슨 놈의 교향곡이냐?”고 비웃기도 했지만 브람스가 쓴 네 개의 교향곡은 오늘날 베토벤의 교향곡들과 동열의, 아니 때로는 그 이상의 대접을 받고 있다.
* 바그너의 철학
바그너의 예술에 있어서 이 '말하는 침묵' sounding silence과 실제로 나타나는 사건과의 관계는,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개체의 세계에 있어서 내적 의지와 외적 현상과의 관계와 일치하는 것이다.
바그너는 그 자신 변전 transition의 예술이야말로 그가 소유한 최선의, 그리고 가장 심오한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는 말했다. "이해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이 이해는 변전의 가장 직접적이고 어쩔 수 없는 '동기화' Motivation를 통해서만 획득될 수 있다. 그리고 나의 전 예술 작품은 이 '동기화'를 통하여 자연발생적이며 필수적인 감정적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으로 구성 된다."
* '개혁'의 바그너에 대항한 브람스의 '보수'
일반적으로 브람스파와 바그너파의 대립으로 알려져 있는 그들의 관계는 본인들의 의식보다는 주위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대립 양상이다. 실제로 브람스는 바그너 작품을 좋아했고 그의 오페라 등을 잘 보러 다녔다. 다만 창작 기법상 서로 다른 문제를 추구했기 때문에 내면적으로 바그너를 의식했던 것이다. 한 시대를 살다 간 천재는 있어도, 일찍이 두 사람의 천재가 동 시대를 살면서 서로의 재능을 불태웠던 일은 우리의 역사를 돌이 켜 볼 때, 그리 흔한 일은 아니다. 브람스보다 20살이나 연상인 리하르트바그너(RichardWagner,1813~1883)는 1813년 라이프치히에서 연극배우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브레스덴과 바이로이트로 이주해 활약하면서 평생을 음악극 작곡에 몰두하다가 아탈리아의 베니스에서 사망했다. 이러한 두 사람이 왜 그렇게 숙명적인 겨룸을 했어야 했는지는 그들의 음악노선을 살펴보면 극명하게 드러난다. 브람스와 바그너가 활약하던 시기는 베토벤과 슈베르트의 사망으로 고전주의가 사그러들면서, 무대가 독일로 옮겨져 낭만주의의 음악이 싹트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그러는 가운데 이슈로 등장한 것이 '베토벤의 뒤를 이을 음악가'였고, 이 때 등장한 음악가들이 베버와 멘델스존, 슈만 등이었으나 이들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사라져갔던 것이다. 독일의 음악계가 이렇듯 스타(?)를 배출하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유럽의 음악계에 나타난 이들이 바로 브람스와 바그너였다. 두 사람은 공교롭게도 서로가 주장하는 노선마저 극명하게 달랐다. 바그너가 독일 낭만주의 오페라 시대를 연, 베버의 뒤를 이어 독일 국민 오페라를 창출해낸 '개혁파' 작곡가였다면, 브람스는 앞 세대의 작곡가인 바하나 베토벤, 슈베르트와 같은 선배 음악인들의 노선을 철저히 뒤따라간 '보수파'였다. 작품 양식에 있어서도 브람스는 악곡을 형식 또는 소재 별로 구분하여 각각 독립된 가운데 완벽성을 기했으나, 바그너는 음악의 모든 장르와 양식을 다만 종합 예술의 일부로 보고 있었다. 때문에 바그너가 오페라 작곡가로 이름을 떨친 데 비해, 브람스는 한 편의 오페라도 남기지 않았고, 브람스가 작곡가가 되기 위해 태어난 천부적인 '작곡가형'이었다면, 바그너는 다방면에 재능을 보인 팔방 미인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또한, 바그너를 후원했던 인물이 리스트였지만, 브람스는 슈만의 뒷받침을 받고 있었고, 영향을 받은 음악인의 성향에 두 사람이 굳어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이렇게 출신 성분이 다르고 성격이 다른 두 사람이 서로 다를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이 가는 일이지만, 무엇보다 이 두 사람의 사이가 그토록 멀리 갈라진 데에는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
* 브람스를 혹평했던 바그너
바그너가 1863년 그의 오페라 '뉘른베르크의 명가수'의 작곡에 몰두하고 있던 무렵의 일이다. 브람스는 이때 바그너가 살았던 하디크가세 72번지에서 그의 조수처럼 사보를 돕고 있었다. 그럴 즈음 브람스에게, 당시 이미 거장이었던 바그너 앞에서 헨델의 변주곡을 연주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고, 연주를 들은 바그너는 브람스를 극찬했다. 이에 고무된 브람스는 역시 '바그너를 대적할 작곡가는 앞으로 없을 것' 이라며 흥분하게 된다. 그러던 두 사람의 관계는 브람스가 '그토록 존경해 마지않는' 바그너 앞에서 두 번째의 연주를 가지게 되면서 그만 깨지게 된다 .예상과 달리 바그너가 브람스를 '전통 속에 갇힌 인물'이라고 혹평을 했던 것이다. 후에 바그너는 코지마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이 문제를 언급하고 있는데, 여기서도 그는 브람스를 '바하나 작곡해야 할 인물'로 혹평하고 있다. 이 사건은 브람스로 하여금 '바그너의 환상'을 깨는데 결정적 기여를 했을 뿐 아니라, 그 후 죽을 때까지 바그너를 '증오'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처음엔 호의적이었던 바그너가 왜 그처럼 표변했는지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후세 사람들은 대체로 여성 문제 때문으로 보고 있다.
* 여성 편력에 있어선 같았던 두 숙적
당시 브람스는 비인의 최대 평론가인 한슬릭에게 바그너의 여자문제를 폭로해버렸고, 이 때문에 바그너는 한슬릭으로부터 심한 공격을 받게 되었다. 한슬릭으로부터 수세에 몰린 바그너는 이 때문에 비인에서 공연하기로 77회나 연습을 거듭했던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취소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여기서 바그너가 공격을 받았던 여자 문제란, 그에게 많은 돈을 꿔주었던 패션 디자이너 골드박과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었다. 바그너는 이 여인에게 연정의 뜻이 담긴 각서를 보낸 적이 있었는데, 이 각서가 그만 브람스에게 흘러 들어간 것이었다. 당시 브람스는 비인에서 모짜르트, 슈베르트, 베토벤등의 자필 서한을 비롯한 음악인들의 악보 수집을 취미로 삼고 있었다. 따라서 바그너의 연서가 브람스에게 흘러 들어간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이 각서를 브람스가 자신의 후견인처럼 활약하고 있는 한슬릭에게 공개했다는 데에 문제점이 있었고, 더구나 그 시기가 바그너가 한스 폰 뷜로우의 부인이었던 리스트의 둘째 달 코지마에게 아이를 갖게 한 때였기 때문에 문제의 심각성이 증폭되었던 것이다. 어쨌든 바그너에 대한 브람스의 폭로 사건은, 하필 '니벨룽겐의 반지'의 성공으로 떠들썩한 유럽 음악계에 찬물을 끼얹은 일대 사건이었다. 졸지에 허를 찔린 바그너는 이에 질세라 브람스의 음악에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브람스가 낭만주의 시대에 바로크와 고전주의 음악을 숭배한 것이 좋은 표적이 되었던 것이다. 바그너는 브람스의 '독신'을 끈질기게 헐뜯으면서, 그의 음악을 '오늘은 길거리의 엉터리 시인이며, 내일은 헨델의 할렐루야가 발쟁이로, 또 어떤 때는 유대인 깡깡이쟁이로 쏘다닐 것이다'라고 힐난했다.
* 유럽 음악계의 양분화
드러내놓고 브람스의 험담을 해대는 바그너에 비해, 브람스는 내성적인 성격 탓인지 침묵으로 고민만을 했다. 그에 비해 바그너는 다혈질에다가 오만하기조차 했던 것이다.
어쨌든 이러한 두 사람의 독설과 공방은 마침내 유럽의 음악계가 양분되는 사태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브람스의 지지파와 바그너의 지지파로 나뉘어진 것이다.
브람스의 지지파는 슈만 부부를 비롯해 부인을 바그너에게 빼앗긴 한스 폰 뷜로우, 당대 최대의 바이올리니윱 요아힘등이었고, 바그너 쪽으로는 리스트를 필두로 니체, 쇼펜하워, 마이어베르등의 인물이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브람스의 지지파인 한스 폰 뷔로우가 그의 부인을 바그너에게 빼앗기기 전까지는 바그너의 숭배자였다는 사실이다.
바그너와 브람스는 여자 문제에서도 격돌하게 되는데, 베젠종크 부인과의 사랑이 그것이었다. 두 번의 결혼 외에도 수없이 많은 여인을 가까이했던 바그너에 비해, 브람스는 여인들을 사랑은 했으나 결혼까지 이르지 못했었다. 이런 브람스를 두고 바그너는 '내시'니 '고자'니 하는 독설을 퍼부었는데, 하필 이 두 사람이 모두 한 여인을 사랑하는 사건이 발생했던 것이다. 바그너와 브람스가 함께 사랑한 여인은 베젠동크 부인이었다 이 여인이 두 사람 중 누구를 더 좋아했는지는 모르지만, 두 사람은 각자 자신 들의 마음을 음악으로 전하며 경쟁을 했지만 결국은 무위로 끝났고, 또 하나의 상처가 각각의 가슴에 남았던 것이다. 숱한 사랑을 하면서도 그 어느 것도 가슴에 안을 수 없었던 브람스는 고독했다. 그리고 자신이 사랑한 여인을 모두 가슴에 안았지만 경제적으로는 무능했던 바그너 역시 그의 삶에서는 실패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그토록 치열했던 음악 혼은 설혹 그들이 서로 다른 길을 걸었을지언정 결코 실패였다고는 그 아무도 얘기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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