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월 6일 아침이다. 오늘은 내가 군대에 가는 날이다. 어제 잠깐 술을 마신게 아직도 깨지 않는다. 우선 머리부터 깎아야하는데 미용실이 열었을래나 모르겠다. 중략...... 그날 일기장에 쓴 내용이다. 논산까지 간다는게 귀찮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던 그 때였다. 길을 가다가 우연히 발견한 롯데리아. '오늘 안 먹으면 언제 먹지'라는 생각에 새우버거를 2개샀다. 맛있게 햄버거를 먹다보니 웬지 가기가 싫었다. 그러나 어쩌랴 안가면 과태료가 20만원이니 그냥 갈 수 밖에...... 논산에 도착하니 1시가 다되간다. 소집하기 30분전. 통화하고 싶은 사람이랑 간략하게 통화를 했다. 운동장에서 신고식을 했는데 저기서 어머니가 손을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 잠시 뒤 다들 사라지고 오래된 초등하교 같은 건물로 들어가는데 기분이 축 쳐진다. 이곳에서 3일간 신체검사와 옷가지를 받으며 대기하다 훈련소로 들어갔다. 도착하니 소리부터 지르며 군기잡는 조교들. '내가 싫어하는게 남의 통제를 받는 건데.' "야 이자식들 지금 부터 소지품 다 꺼낸다 실시!" 나도 군말이 없이 거의 다 꺼냈다. 내 앞에 슥 오더니 약을 왜 이렇게 많이 가져왔냐며 내가가지고 온 감기약 두통을 다 뺏어가는데 죽을 지도 모른 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나는 감기에 무척 약한편이라서 비오는 날에는 외출을 안 할정도로 잘 걸린다. 밖에서 하루종일 훈련하는 바람에 저녁만 되면 약타먹으로 의무실만 들락거렸다. 어느 날은 심한 복통까지 와서 난생 처음 침까지 맞았다. 말도 잘 안 듣고 아프기까지 하니 조교들은 '고문관'하면서 사람 성질 슬슬 긁는데,'니네 말 안 들으면 고문관이냐!' 하여간 게으른 나에게는 집에가서 쉬고 싶은 맘뿐이었다. 한창 방학때인지라 왜 방학때 좀 놀다 가지 않았나 후회도 많이 했었다. 규칙적인 생활은 시간감각을 마비시킬정로라서 6주라는 훈련기간은 쏜살 같이 지나갔다. 다들 이때 쯤 되면 자신의 배치문제로 마음이 고무되어 있었다. 하나하나씩 부르다 결구 내차례까지 갔는데. "황의교" "예" "너는 법무부다" "네!?" 뭐지 이건 하고 생각했는데 그게 '경비교도대'라는 것이었다. 법무부라고만 할 때까지는 그럴 듯 해 보였는데 막상 그런 곳으로 가려니 축 쳐지는 것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4일 뒤 다른 연대와 합류해서 용인에 있는 법무연수원에 갔다. 법무연수원하며 으례 사법고시 패스자들이 와 연수받는 곳으로 대부분 알지만 교정시설에서 근무하는 사람들도 다 여기서 근무를 받는다. 이 곳에서의 2주기간은 낙원과 같았다. 훈련소와 비교도 할 수 없는 맛있는 밥과 휴식시간이면 마음대로 누워있고 배운거라고는 경비교도대에 나오는 간략한 법령과 포승줄 묶기, 교봉술, 총검술 정도다. 여기서의 화두도 배치문제이다. 전국에 약 50여개의 교정시설이 있는데, 운이 좋으면 대전에서 있을 수 있고, 아니면 서울, 또 아니면 저기 제주도 까지 갈 수 도 있는 것이다. 빽이 있으면 대전 가는 것은 쉬운 문제라고 하는 데 우리집에는 그런 사람이 없다. 결국 아무 연고도 없는 울산으로 가게 됐다. 2주 교육이 끝나니 다음 아침, 전국에서 닭장차가 우루루 몰려오는데 '사람 잡아가는 구나' 하는 생각만 머리 속에서 맴돌았다. 버스를 타니 외부에서 내부에서 사람이 볼수 없게 철판이 좍 붙어 있는데 조그맣게 구멍이 뚫렸지만 조금만 봐도 머리가 아파서 이것은 포기. 잠 실컷 자며 울산까지 내려갔다. 어둑어둑한 저녁이 될 즈음에야 울산구치소에 도착했다. 심상치 않은 시선들이 나를 쉬쉬하며 보는데 가슴이 미어지는 듯 했다. '이놈들이 날 잡아먹으려고 혈안이 돼 있구나.' 며칠간 신병내무반이란 곳에서 소대장에게 교육받으며 내무반에 들어갔는데 가보니 첫 날부터 각잡고 취침시간 되서 누울라하니 교육한다고 이놈들이 모포 뒤집어씌우면서 쏼라쏼라 하는데 짜증나기 시작했다. 이놈들은 피고한지도 않은지 무진장 쏼라쏼라 해 댔다. 새벽에 남들보다 30분전 일찍 기상해서 쓰레기통하고 물 비우고 한 뒤 바로 위 고참 깨운다음 일교까지 깨우면은 이제 모포를 쏜살같이 갠다. 때로는 나 보다 밥도 안되는 놈도 누워 있는데 먼저 깨우냐고 지랄 하는 놈도 있다. 그 몇 초차이가지고도 지랄병에 걸린 인간들이 가끔 있었다. 그렇게 구보 하고 청소하고 세수하고 옷입고 밥먹고 근무하기까지 눈 코 뜰새 없이 바쁜시간이다.
경비교도대는? 나의 전역증에는 육군 병장제대 1111이다. 간단히 얘기해서 육군참모총장이 법무부장관에게 병력을 빌려주고 나중에 다시 돌려받는 식이다. 다시 육군으로 가지는 않는다. 경비교도대는 1980년 국보위(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에서 만들었다. 교정시설의 보안 때문이다. 계급은 이교->일교->상교->수교 순이다. 전경과 비슷한데 끝에 '교'자를 넣었다. 총인원이 5000명도 안되는 작은 집단이라 모르는 사람도 많다. 내가 있었던 울산 구치소는 90년대초에 만들어져서 비교적 신식 건물에 속했던지라 시설도 좋았지만, 구치소인자라 민원인도 많이오고, 변호사도 많고, 그만큼 외부인이 잦으니 안에서 말도 되게 안 듣고 일거리도 많다. 교도소는 형이 확정된자(수형자)를 받는 곳이고, 구치소는 아직 재판이 안 끝난 미결수(수용자)를 받는 곳이다. 우리는 보통 기결수, 미결수 하는데 100% 기결, 미결인 곳이 없다. 왜냐하면 내 생각인데 미결은 일을 시키지 못한다. 그래서 안에서도 일거리가 많이 있다. 그래서 기결이 필요하고, 또 두가지 건물은 다 짓는데 어려움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이들은 분리 수용한다.
근무와 생활 문지기 나의 경험으로 쓴다. 워낙 일이 많고 잡다한 곳이라서 다른 곳에서 근무한 사람들과는 다를 수 있다. 짬이 안되는 초기때는 서 있는 일이다. 곳곳에 철문에 서서 사람을 본뒤 문을 열어주거나, 감시대라고 높은 곳에 올라가 총들고 탈주자를 막는 곳을 한다. 2시간 일하고 2시간 쉬는게 기본적이지만 밥안되는 쫄따구가 어디 쉴 틈이 있겠는가. 근무 끝나자 마자 잽싸게 밥먹고, 풀뽑거나 작업하고, 고참들 빨래, 휴가자들 워커닦는 일로 이시간을 채운다. 워커 닦는 일은 앉아서 하기 때문에 천국 같은 일이고, 작업한뒤 다시 근무 나가는 경우는 밥먹을 때는 의자에 궁둥이를 델 뿐, 그렇기 때문에 다리가 내 다리가 아닌 지경이 된다. 상교 꺽이는 정도면 서 있는 근무가 없지만, 후유증이 남아선지 나는 아킬레스 건 쪽에 이상이 있어서 제대 후 반년정도 침 맞으러 다녔다.
접견과 출정 그 다음에 또 얘기 할 만한게 접견과 출정이다. 접견은 한마디로 면회다. 특히 구치소는 미결수가 많아서 접견이 중요한 업무라 할 수 있다. 미결수는 1일 1회, 기결수는 한달에 4번 허용한다. 이런 경우가 있다. 김아무개를 어머니가 면회하러왔는데 면회가 안된다. 알고보니 아침에 누군가 벌써 면회를 하고 간 것이다. 그럴 경우, 1일 1회라는 규정때문에 어머니는 면회를 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수용자 가족에게 면회사실을 얘기하는게 좋다. 예약접수라고 전화 접수도 가능하다. 내가 한일은 안에서 면회 내용을 종이에 적는 것이다. 밀폐되고 좁은 곳에서 적다보니, 거의 매일 있다시피한 야간근무와 힘든 내무생활때문에 종종 졸기도 한다. 하여간 이 것 때문에 집합도 많이 당했다. 또 변호사 접견(변접)이 있는데 사무실에 있다가 변호사가 요구하는 수용자를 연출(방에서 데리고 오는 것)하는데 여기서 변호사의 세계를 나는 간접적으로 체험했다. 능력있는 변호사는 30여명까지 부른다. 머리 수를 세어보면 돈이 보인다. 한명당 얼마라고 나도 정확히는 모르지만 형사사건의 경우 수백에서 수천까지이다. 한 예로 공소변경이라는게 있다. 사람을 죽일 경우 살인죄와 상해치사죄가 있다. 이 것의 차이점은 피의자가 계획된 범행인지 아니면 우발적인 것인지에 따라 달라진다. 한마디로 능력있는 변호사를 고용하면 살인죄가 상해치사죄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죄명이 바뀌는 것을 공소변경이라 한다. 물론 돈이 많이 든다. 대부분의 변호사의차가 에쿠스, 다이너스티, 뉴그랜저였다. 간혹 이상한사람이 짚차를 모는 것을 봤다. 나는 또 민원접수일까지 했는데, 내가 전산처리를 한뒤 뒤에 연락이 되서 면회가 이루어진다. 내 옆에 있던 놈, 예전에 인터넷다음에서 사람찾기를 이용해서 면회오는 이쁜 아가씨와 메일 주고 받으면서 사랑을 키우는 가 했더니, 언제부턴가 연락이 끊긴게 아무래도 안에 사람이 나갔나 보다. 민원인들은 내가 직원이 아닌데도 친해지려 하는 경우가 있다. 왜냐하면 밖에 사람들은 무지 똥줄타기 때문이다.
출정은 법원과 검찰청에 가는 것이다. 구치소는 미결수가 많은 곳이라 법원은 많이 들락달락한다. 닭장차에 가득 태우고 간다. 이 때 필요한게 포승을 묶을 줄 알아야 한다.(나도 이제 가물가물하다.) 법무연수원에서 배워서 여기서 써먹는 것인데 한두번 출정가면 수준급이 된다. 교도소에서 날라온 고참을 보면 포승줄을 할 줄 모른다. 교도소는 법원 갈일이 드물어서 인가 보다. 특히 밥 안되는 인간들은 이 곳에 가기를 갈망한다. 내 차기고참은 심지어 휴가나가는 기분이라는 말로 가보지 못한 나를 환상에 빠뜨리게 했다. 전화도 마음 것 걸수 있다. 맛있는 것도 배부르게 먹는다는 둥으로 얘기하는데 나는 부럽기만 했다. 가보면 알지만 이곳도 하나의 사업장소같은 느낌이다. 경매매물보러 오는 사람들, 변호사들, 등기부떼는라 정신없는 법무사 사무실 아가씨들, 돈이 정신없이 오가는 것 같았다. 내가 느낀 것중 또하나, 이곳도 무지 졸린 곳이라는 것이다. 검사와 변호사가 얘기하는 것을 들을라하면 잠이 쏟아진다. 나 뿐만 아니라 앞에서 서기보던 아가씨도 졸 정도다. 그런데 판사들은 꼿꼿이 앉아 그것을 쉬지않고 4시간씩이 앉아 있는 것이다. (게임을 그렇게 하라고 해도 못하겠다.) 한마디로 판사해먹는게 쉽지 않다는 것이다. 또 대부분 법원옆에는 검찰청이 있다. 검사한테가서 조사받는데 보통 검사실은 직원이 가는데 직원이 모자라서 나도 같이 갔다. 그때 본 검사는 180이상에 생긴것도 깡패처럼 생겨서 무섭게 생겼다. 심문은 대부분 사무관이 한다. 그런데 피의자가 거짓진술은 하는 것 같은 경우, 욕이 튀어 나온다. 내가 쓰다보니 검사를 욕하는 것 같지만, 옆에서 듣다 보면 답답하다. 피의자가 대부분 지랄병이 들었나, 헛소리만 자꾸 해대는데 했던얘기 또하고, 내가 전에 티비에서 폭행검사얘기로 메스컴에서 떠듣는 것을 보며 '뭘 모르는 것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땡보직 고참이 되면 땡보가 된다고나 할까. 당시에는 난 이교때는 하며 밑에 애들 무지 갈구었지만, 편했던 시절이다. 겨울에는 아침저녁으로 온수나와서 샤워하고, 컴퓨터실이 있어서 게임하고(고참만), 당구치고, 노래방기계쓰고, 밤에 출출 하면 라면먹고, 야간근무 있을 때는 순찰도다가 통닭집에 전화걸어 닭먹고, 하긴 그때 나랑 순찰 걸린 놈들 무지 좋아했었다. 나랑 있으면 통닭먹으니까. 하두 잘먹어서 보통 하는 말이 밥안될때 살 찌다가, 고참되서 제 몸무게 찾는 다지만, 나의 경우는 이교, 일교시절 5키로 넘게 빠지다 다시 더불로 쪘다. 근무도 편했었다. 취장,구외순찰, 영치, 쓰레기 분리, 직원이발 등 편한 게 이런 것인데 취장은 밥하는 곳이다. 내가하는 것은 검식, 점심과 저녁의 메뉴를 보안과장, 의무과장, 소장한테가서 맛보게 한뒤 싸인 받으면되는 간단한 일이다. 이일은 나는 좋아했는데 앉아서 직원들고 잠깐 노가리 까면 되고, 점심과 저녁사이에는 간식도 만들어서 내가 즐겨 먹었었다. 구외순찰은 구치소 한바퀴돌고, 싸인 하고 티비 보는게 하루 일과고, 쓰레기 분리는 기결수데리고 쓰레기 분리하는 것 지키는것이다. 시간도 금방 걸리 뿐더러 여성잡지보면 머리를 식히는 그런 곳이다. 다 좋았는데 그 중에 가장 지랄이 영치였다. 하는 일은 전날 구속된 자들이 벗어서놓은 옷가지와 소지품을 조사해서 기록한다.(정말 싫다.) 그리고 확인 지장받고 점심에는 민원인들이 놓고 간 속옷 책 기타의 물건을 조사하고(대부분 담배조사다.) 다시 집어넣고, 나눠주고, 간혹 안 받았다 지랄병 하는 인간이랑 싸우곤한다. 영치금이라는 것도 있는데 이는 직원이 관리한다. 이것은 외부에서 돈을 넣어 주어서, 안에서 이돈으로 물건을 산다. 물론 직접은 아니고 우리가 체크해서 돈을 빼간다.
훈련 별로 하는 것 없다. 기동타격대에서 잠깐 배우는 진압술하고, 딱 일년에 한달정도 감사기간 대비해서 폭동진압술, 총검술 연습하는 것이다. 빡세게 굴리지만 기계처럼 딱딱 맞는 우리들의 훈련모습을 캠코더로 보니 보람을 느낀다.
이제 마무리 생각해보면 바쁜 시절, 쓰디쓴 시절이다. 구치소 옆에 있던 울산월드컵경기장을 보면서 시간이 가는 것을 느꼈고, 휴가나와서 오래만에 보는 아버지, 어머니 얼굴을 보면 세월이 흘러감을 느꼈다. 이교때 편지 못 쓰게 한것, 고참바지 빤것 언 놈이 훔쳐가서 잠 못자면서 맞은 것, 신문지가지고 거울 닦으려고 물 묻힐때 신문읽었다고 사람 병신 만든것, 전역복줄이 안 섰다고 개 지랄한놈(이새끼는 아예 손도 안댔었다.) 지랄 같은 소대장이었지만 자기돈으로 내 사랑니 빼준 소대장, 택견가르쳐준 문수형, 내 할일까지 해준 효영형, 화장실청소부터 휴게실 소파까지 같이 함께한 동기들, 그 외 나를 따라준 우리 후배님들, 마지막으로 감기 덜 걸리라고 울산으로 내려보내준 신께,다들 용서하고 또 고맙게 생각한다.
2003년 한해 가 저물 어느 날에 옛생각을 떠올리며 글 을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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