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찌 독일의 히틀러에 의한 600만 유대인 학살 사건은 인류가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가를 잘 보여주는 한 예이다. 이 일은 가장 비극적인 역사적인 사건이다. 이러한 일이 현대에도 일어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무고한 600 만의 유대인들을 학살한 이 사건을 우리는 홀로코스트라고 부른다.
홀로코스트(Holocaust)란 말은, 짐승을 통째로 태워 바치는 번제를 뜻한다. 600만명의 유대인들이 아무 죄도 없이 가스실로 끌려가 학살당한 이 사건을 왜 홀로코스트라고 부르는 것일까? 이는 600만 명의 유대인들이 희생 제물로서 바쳐졌기 때문이다. 600만 명의 유대인들을 하나님 앞에 드린 제물로, 순교자로 기리기 위하여 홀로코스트란 용어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유대인들은 이 사건을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린 것과 연관해서 이해를 한다. 아들 이삭은 홀로코스트로서, 즉 번제로서 하나님 앞에 드려졌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아들 하나를 홀로코스트로서 드렸지만, 유대인들은 600만 명의 아들과 딸들을 홀로코스트로서 바쳐야 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 가운데 하나를 바치도록 하였다.
그에게는 또 다른 아들이 하나 더 있었다. 그러나 나찌 독일의 포로 수용소에서 수많은 아버지와 어머니들은 자기 자식들 가운데 가스실로 보낼 아이를 선택해야만 했다. 그들은 나찌 독일에 의해 잔인하게도, 먼저 가스실로 들여보낼 아이를 선택하도록 강요를 받았던 것이다. 유대인의 역사 가운데서 아브라함은 단 혼자가 아니다. 홀로코스트 사건은 수많은 아브라함과 사라들을 만들어냈다. 더 이상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바친 이야기는 까마득한 옛날 이야기가 아니라, 성서에나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몇 십년 전의 이야기였고, 현실 가운데서 일어난 일이었다. 이 사건을 통해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바친 이야기를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다.
유대인들은 그들을 용서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일을 잊지는 않을 것이다. "Forgive, but not forget" 이라는 구호가 이를 잘 말해 준다. 용서는 하되, 그런 일이 다시는 되풀이 되지 않도록 결코 그 일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을 위하여 용서를 비는 기도를 드렸다. "주여, 저들은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오니, 저들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그러나 나찌 독일은 분명히 그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겼다. 그들은 그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했던,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던 로마 군인들과는 다른 사람들이었다. 그러기에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나님, 저들을 용서하지 마옵소서. 저들은 저들이 하는 일을 너무 잘 알고 있었사옵니다."
아브라함은 두 아들 가운데 하나만을 바쳤지만, 나찌 독일의 유대인들은 자식들 모두를 가스실로 보내야 했다.
아브라함은 그가 아들을 바쳤다는 것 (더 정확히는 바치려고 했다는 것) 때문에 위대한 믿음의 인물로 칭송을 받아왔다. 그러나 그보다 더 많은 자식들을 "홀로코스트"로 바쳐야만 했던 유대인들이 얼마나 많았는가? 더 이상 아브라함은 그들 앞에서 자랑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그들 앞에서 아브라함의 영광은 쇠퇴하게 되고 만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도록 하신 분은 하나님이었다. 그러나 600만 명의 유대인들이 번제물(홀로코스트)이 된 것은 사탄에 의해서였다. 하나님의 명령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사탄의 명령에 의한 것이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회개해야 할 것은 그들이 이 일에 방관했을 뿐만 아니라 동조하고 또 적극 협력했다고 하는 사실이다. 유대인들은 그들이 받아야 할 피값을 받은 것 뿐이라고 생각하는 기독교인들이 많이 있다. 예수를 죽인 형벌을 치룬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였다고 해서 그 후손들을 600만 명이나 잔인하게 죽게 만드는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하나님인가? 그런 하나님을 어떻게 상상이나 할 수 있단 말인가? 예수께서는 이미 십자가 위에서 그들의 죄를 다 용서하시고, 또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드리지 않았는가? 그 기도는 예수님께서 마지막 드리신 기도였는데, 그 기도를 하나님이 그런 식으로 이루신 것일까?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인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러한 저주를 받게 된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바로 다른 아닌 600만명의 무고한 피를 흘린 히틀러와 나찌 독일이었는데, 오늘날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에 의해 희생양으로 드리기 위해 결박당해 있는 이삭을 자신들과 동일시하기도 하였다. 역사를 통해 얼마나 많은 유대인들이 희생양들이 되었는지 모른다. 그들은 박해를 받고 역사의 희생양들이 될 때마다, 제단 앞에 묶인 채로 누워있던 이삭을 떠올렸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삭을 희생양이 되게 하지 않으셨다. 그를 구해주셨다.
마찬가지로 결국에는 하나님이 그들을 기적적으로 구해주시리라 믿고, 그들에게 주어진 고난을 참고 이겼던 것이다. 유대인들은 가스실로 끌려가는 자식들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께서는 제물로 바쳐진 이삭을 다시 살리셨듯이, 그렇게 기적적으로 반드시 그들의 아들 딸들을 살리시리라고 믿었다.
홀로코스트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600만 명의 이삭을 만들어냈다. 그들은 이삭처럼 하나님 앞에 희생제물로 드려졌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부활하였다. 홀로코스트를 통해 이스라엘이 다시 생기게 된 것이다. 이스라엘의 독립은 바로 이삭의 부활이었다. 하나님께서 이미 번제물로 바쳐지고 재만 남은 것이나 다름없는 이삭을 다시 살리신 것처럼, 수백만의 이삭을 이스라엘 나라의 창설을 통해 다시 살리셨던 것이다.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운명을 제단에 포박당한 채 누워있는 이삭과 동일시여기는 까닭이 바로 이러한 데 있다. 그들은 이삭처럼 고통 당하고 희생당할 때, 하나님이 이삭을 다시 살리셨듯이 그들도 다시 일어나리라고 믿었다. 이삭은 그들의 희망이었고 미래였다.
기독교인들은 이삭을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의 관점에서 이해하지만, 유대인들은 그들의 역사와 연관시켜 이해를
하고 있다. 그들은 역사를 통해 얼마나 많이 고통을 당했는가! 그리고 그들은 수없이 죽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때마다 다시 부활하였다. 그것이 이삭 이후의 이스라엘의 역사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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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반부로 가면 유대인과 기독교를 조금 찬양하는 것 같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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