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정류장은 월드메리디앙, 월드메리디앙 아파트입니다. 다음은 ….” “머라하노? 월드메리 맞나?” “그런갑네예.” 친척집을 찾아온 듯한 할머니와 아주머니는 이렇게 어림짐작을 하며 버스에서 내렸다.
주공 2단지, 잠실 시영, 상계 8단지, 호수마을, 효자촌 같은 아파트 이름은 이제 역사 저편으로 밀려났다. 에클라트니 XI니, 암호 같고 약호 같은 요즘 아파트, 주상복합건물의 이름은 난해한 외국어 그 자체다. 집 한 채가 소망인 서민들에게뿐 아니라, 웬만한 자산가들에게도 부동산이 곧 재산이자 재테크이고, 미래 투자인 한국 현실 때문일까. 꿈이며 이데아인 아파트 이름을 누구나 쉽게 알아먹을 건설사 이름이나 무슨 무슨 마을 식의 순진한 작명법으로 짓는 것은 시대의 요구에 거스르는 태도다.
건설사 이름 대신 새로운 브랜드명이 도입된 것은 90년대 말부터. 삼성건설이 밑도 끝도 없는 한자명 ‘래미안(來·美·安)’이란 이름을 아파트에 붙인 뒤 ‘미래의 아름답고 편안한 아파트’라고 그럴듯하게 해몽한 게 인기를 끌자, 너도나도 새로운 작명법을 가동하기 시작했다. 꿈에그린, 어울림, 풍요로운, 해오름, 푸르지오 등 우리 말을 원용한 이름도 있지만, 대세는 역시 외국어. Extra Intelligent(특별한 지성)라는 뜻의 ‘자이(XI)’, ‘소유했다’는 뜻의 ‘위브(We’ve)’ 같은 이름이 뒤따랐다.
그러나 이처럼 난해하기만 한 아파트 이름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싶은 범상한 인간의 소박한 꿈이 여전히 스며 있다. 아파트 이름 뒤에 붙은 빌(ville)이 그것이다. 네오빌, 수퍼빌, 그린빌, 노스빌, 쉐르빌(소중한 공간), 미켈란 쉐르빌(미켈란젤로+소중한 공간), 나띠르빌(자연의 마을), 상떼빌(건강한 마을)….
그런가 하면, 남다른 ‘호화로움’을 위세로 과시하고 싶은 사람을 위한 작명도 넘쳐난다. 골든(황금)으로는 이제 성이 안 차는 마당이니, 플래티넘(백금), 하이페리온(빛의 신)을 거쳐 파크 리젠시(공원+섭정), 아크로비스타(최정상+전망), 리버아크로파크(강변의 정상 공원)로 거창하게 발전한다. 서울 도곡동의 고급 주상복합 ‘타워 팰리스’ 등장 이후 ‘팰리스(성)’자가 붙은 것이 새 유행이다. 루체 팰리스(달빛 궁전), 로열 팰리스(귀족의 성)에서 이젠 까놓고 캐슬(성)까지 등장했다. 웬만한 사람은 다 알아먹는 영어 대신 프랑스어로 뭔가 조금 더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좇기도 한다. 르 메이에르(최고), 월드 메르디앙(세계의 자오선), 에클라트(갈채)가 좋은 예다. 비틀스가 노래했고, 무라카미 하루키가 소설 제목으로 쓴 ‘노르웨이의 숲’까지, 건물 이름은 상상력의 한계에 도전한다.
이런 엄청난 아파트 작명법의 바탕에는 ‘꿈’에 대한 욕망이 있다. 채완 동덕여대 교수는 지난달 열린 한국사회언어학회와 담화인지언어학회 공동학술대회에서 30년간의 아파트 이름 작명법을 분석, “임대아파트에 비해 고급아파트일수록 현학적인 이름이 많으며, 이 경우 팰리스, 로얄, 스위트 등의 단어를 많이 사용한다”고 지적했다.
이 같은 ‘고급 이름짓기’는 건설사의 전략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서울 반포 미도아파트는 외관을 도색하며 주민들의 의견을 모아 ‘센트럴 빌’이라는 이름으로 바꿨다. 이 지역 부동산중개소의 한 관계자는 “타워 팰리스 이후, 아파트 리모델링이나 재건축 때 완전히 분위기를 바꿔 그런 이름으로 가는 일이 많다”고 말했다.
꿈이 현실을 배반하듯, 이름은 언제나 현실보다 앞서 간다. 10평 안팎의 아파트에 ‘맨션’이란 이름을 달았던 70년대와 20·30평 안팎의 서민 주택에 ‘팰리스’가 붙은 것은 차라리 소망의 발원(發願)이라고나 하자. 현실에서 더 큰 문제는 아파트 단지 이름이 곧 버스 정거장 이름이 되는 우리 상황에서 빚어지는 의사 소통 불능의 문제다. ‘에클라트 지나서 이니그마빌을 끼고 좌회전해서 상떼빌에서 우회전’의 우리 동네 작명법은 지적(知的) 약자를 배제 시키는 횡포다. ‘월가의 부동산’이라는 경기도 분당 신도시의 한 부동산업소 이름은 부동산을 둘러싼 욕망과 상상력의 거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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