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8월 5일 일요일

투쟁

히틀러는 자서전 이름을 '나의 투쟁'이라고 지었다.
많은 종교에서는 인생을 고통으로 보고 금욕적인 삶을 강조한다.
사회계약론에서도 인생은 만인(다른 모든 사람)과의 투쟁이다.
생물학에서도 인생은 경쟁이고, 경제학에서도 그렇다.
그게 아마도 진리에 가장 가까울 지는 모르겠지만
매순간 그것을 인식하면서 아드레날린을 분출하는 것은 건강관리에는 매우 좋지 않다.
세상 모든 일에 그렇게 교감신경을 흥분시키다보면 고혈압, 심장마비, 온몸의 근육이 경직되어 버린다.

배수진도 너무 자주 시도하면 위험하다.
(초한지에도 한신이 배수진을 치면서 그렇게 말했다.)

사람이 너무 긴장하면 오히려 당황하기 마련이다.
외국여행이 좋은 예인데, 대부분의 여행기를 보면 사람들은 외국여행 때 너무 긴장을 한다.
일부 위험한 국가(남미의 어느 깊숙한 곳, 아시아, 아프리카의 교전지역들...)를 제외한 곳이면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사람들은 당신을 죽일듯 달려들지 않는다. 그들도 자신의 일상을 살아갈 뿐이다.
매일 걷는 길이고, 매일 보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다.

길을 잃어도 대게 버스를 다시 타거나 택시를 잡으면 된다.
자신이 들어온 곳은 다 나갈 수 있게 되어 있다.
정말로 위험한 곳은 가기조차 쉽지 않게 되있다.

나는 지방 출신이라서 평생 이런 이야기를 듣고 살았다.
'서울가면 코 베어간다더라.'
고향에선 길을 잃어본적이 있지만 여기서 길을 잃어본 적은 없다.
(Backtracking을 잘 해서인지, 사실 정말로 답답하게 길을 잃어본적은 없다.)
세상 대부분의 국가들은 이미 거의 모든 곳에 문명이 손길이 닿고
개발이 끝났기 때문에 상식의 수준에서 위험하지도 않고 당황스럽지도 않다.
태연하게 길을 걸어가면 내가 지방에서 왔건, 외국에서 왔건 남들이 알 수 조차 없다.

수많은 선생님들이 시험을 목숨걸고 보라고 말하곤 한다.
과연 그게 목숨만큼 소중한가? 학생들은 그래서 시험을 못보면 간혹 정말 죽기도 한다.
올해 안되면 내년에 또 하면 되고, 약간 목표를 낮춰서 가면 된다.
명문대 나왔다고 인생 다 잘되는 그런 단순한 게임이 아니다.
입시학원이 만들어낸 공포 마케팅일 뿐.
여고괴담 따위의 인심 흉흉한 공포물처럼 2등 학생이 1등 학생을 죽인다고 세상이 자기것이 되지 않는 다.

세상 모든 일에 대안을 만들어두고, risk management를 하는 편이 목숨걸고 하나만 하는 것보다 낫다.
사회계약론의 투쟁의 결론도 결국은 적절한 계약을 통해 모두가 무기를 내려놓고 행복해지는 것 아니던가?

자신의 삶을 쉽게 체념해버리라는 것은 아니지만 모두가 나를 잡아 끌려고 하거나, 그들을 모두 이겨야 할 필요도 없다.
현실에서든 가상에서든 피할 수 있는 모든 충돌은 피하는 것이 좋다.
내게 진정 도움이 되는 유효충돌만 잘하면 된다.

FTA가 되건 신자유주의 할아버지가 되건, 빌게이츠의 IT혁명이 성공하건, 무제한적 경쟁은 세상에 없다.
진화론과 자본주의의 극단적 단순화 모형에 불과하다.

진리가 1개가 아니고, 아름다움의 기준도 1개가 아니고, 신도 하나가 아닌 것처럼 경쟁도 그런 단순한 모델에서 하나의 goal를 위해 벌어지지 않는다.
세상 모든 사람이 1등 빼고는 다 죽어야 된다고 믿지만 않으면 실제로 1등 빼고 다 죽는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

사실 우리의 자본주의가 우리의 숨통을 덜 조이는 이유는
공산주의자들이 자본주의를 믿지 않기 때문이고, 이성적이지 않은 사람들이 시장을 적당히 교란하기 때문이고, 일부 무슬림들이 서구와는 타협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중국과 인도가 자본주의에 편입되면서 경쟁이 2배로 심해진건 생각해보면 인류의 큰 불행인지도 모른다. 자본주의가 그렇게 팽창하기 전까지는 지구도 버틸만 했는 데, 이 사람들도 뛰어들면 이제는 정말로 투쟁이 투쟁을 낳게되고 자원이 고갈되서 정말 크게 싸워야 될지도 모른다. 경제학의 도구들이 제대로 되어있다면 커다란 인플레이션과 경제 대공황 따위로 인류를 한 번 호되게 괴롭히고는 자원이 고갈되기 전에 깨닫게 해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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