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영어번역 수준은 갈수록 좋아지는 것 같다.
그 많은 수업시간과 돈을 쏟아붓는 데, 좋아지는 건 당연하겠지.
한편 중국어, 일본어는 번역이 훨씬 쉽지만 번역이 질이 썩 좋지 않은 게 많다.
수천년간 역사와 문자(한자)를 공유했기 때문에 번역을 쉽게 생각하는 것 같다.
중국어와 일본어를 한국어와 함께 공부한 사람들(번역자들)은
그 언어들과 우리 언어의 어휘가 너무 겹치는 게 많기 때문에
동음이의어라든지, 한자 단어 중에서 중국과 일본에서만 쓰이고 한국에서는
일상적으로 쓰이지 않는 단어를 잘 구분하지 못한다.
그래서 단순히 한자의 음가만 한글로 적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는 번역기로 그냥 돌려도 이 언어들은 개별 어구나 문장단위에서는 잘 번역된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정말로 잘된 번역인지 검토하기가 쉽지 않다.
특히 중국어의 경우는 조사와 띄어쓰기가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문장이 매우 중의적이다. (덕분에 rearrangement도 얼마든지 가능하고 파자놀이도 매우 발달했다.)
가끔은 중국어로 된 책이나 영상물을 한국어로 번역한 것을 보는 것보다는
영어로 번역하는 것을 보는 게 오히려 이해가 쉬울 때도 있다.
왜냐하면 위에 말했던 번역을 쉽게 생각해서 독자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부분이 줄어든다. 영어나 서양사람을 타켓으로 한 번역에서는 독자에 대한 배려가 두드러지고 대충 얼버무려서는 영 엉터리 번역이 되기 때문에 매우 신경을 써서 번역할 수 밖에 없다.
언어 외적인 부분을 들자면 역사성이나 애국심 같은 면이있다.
그들과 우리는 역사적으로 매우 얽혀있고, 현재도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항이 매우 많기 때문에 객관적인 번역이 불가능하다. 한국인을 독자로 하게 되면 일단 한국인의 애국심을 배려해줘야하고 중국이나 일본에게 당한 침략의 역사를 잘 덮어줘서 자존심을 세워야 하기 때문에 여러가지 면에서 입지가 좁다.
반면에 서양의 독자들에게는 좀 더 직설적인 번역이 가능하다. 중국인, 일본인들의 관점에서 그대로 번역을 할 것이기 때문에 한국을 무시하는 (우리가 그들을 좀 얕잡아보듯이) 부분도 적어버릴 수 있다.
중국, 일본 책을 번역한 것 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에 대한 어떠한 책이라도 그 대상으로한 어떠한 사회, 역사적 서술에도 적용이 된다.
그 예로 '일본은 있다.', '일본은 없다.' 시리즈의 책들이 대표적인 예이다. 90년대에 엄청난 논쟁에 쉽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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