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2월 25일 수요일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가 된 기분이다.

오늘도 우리 팀하고 옆 팀하고 술을 먹었는 데.
아주 복잡한 스토리가 있다.
3개월 전에 우리 팀장님과 옆 팀 팀장님이 한 번 술을 드셨는 데.
일방적으로 우리 팀장님이 이기신 뒤로 옆팀 팀장님이 엄청 열 받으셔서
장난 반, 복수 반으로 전쟁을 시작하게 됐다.

우리 팀장님은 사람 놀리는 데 아주 뛰어나시고 옆 팀 팀장님도 항상 놀림 당하시면서 분해하시는 걸 한 편으로는 즐기시는 데. 아무튼 그래서 오늘 장수들(팀원들)이 모두 쓰러질 때까지 술 마시면서 전쟁하기로 했다.

옆 팀에는 술을 잘 먹이는 막강 맴버가 한 분 계시는 데. 여자분이시다.
그 분 옆에 있으면 엄청 마셔야 되기 때문에 우리 팀장님도 그 분만 보시면 쫄 수 밖에 없어서.. 아무튼 우리팀이 불리한 전쟁이라 피하고 싶었지만 뭐 세상사가 그렇듯.. 오는 불운을 어떻게 피하랴.. 전쟁을 하게 됐다.

전쟁이라고 해도 무조건 너 한잔 나 한잔 죽을 때까지 계속 한 잔씩 먹는 건 아니고 먹고 싶은 사람들끼리 끝까지 먹는 거다.

뭐 소리를 질렀다가, 서로 술값 계산하라고 했다가 업치락 뒤치락 하고 맴버가 절반으로 줄었다. 다들 자기들 핑계대고 잘 빠져나갔다. 그냥 휭~가면 다음날 그리 뭐라고 하지는 않으니까.

평소같으면 나도 그냥 갔을 텐데. 오늘은 어쩌다가 그냥 앉아 있었다.
뭐 내가 별로 못 마신다는 걸 사람들이 모두 안뒤로는 술을 많이 주지는 않는 다.
내가 안 마시면 화를 내다가도 또 자기들이 내 몫까지 먹는 다. 의리라고 해야 할까? 그들의 객기일까? 뭔지 설명은 안되는 신기한 사람들이다.
내가 안 먹었다고 화를 냈다가 내가 쫄아서 또 계속 조용히 있으면 아무렇지도 않았다는 듯 다른 얘기한다. 술 안 취한 것처럼 진지하게 얘기하다가 매 문장마다 모순되는 말을 하니 이해가 잘 안된다.

먹으면 기분이 좋아서 먹는 다는 데. 나중에 속 버리고 몸도 안 좋을 것 알면서 무리하게 먹는 건 이상한 자학(자해)다.

아무튼 그냥 도망갔어야 되는 데, 그냥 가자니 왠지 예의에도 어긋나보이고 해서 다시 돌아왔다. 자기는 술 안 먹으면서 남에게 술 자꾸 권하는 얄미운 사람이 있는 데. 자꾸 술 먹는 분위기를 부추기니까 술 자리도 길어지고 집에도 못가는 거다. 그래서 내가 화나서 딱 한 마디 따져 물었다.
"술이 그렇게 좋으세요?"

비수를 찔렀더니. 울면서 집에 갔다;;
여자분이었는 데. 내가 왜 그랬나 모르겠다.
사과를 하려고 했는 데. 주위사람들이 내일 하란다.

아무튼 내가 저지른 잘못 덕분에 술 판을 박살내고 일찍 들어올 수 있게 됐다.

근데 또 이상한건.. 이거 분명 내 잘못인데. 주위 사람들이 잘못은 아니란다.
내가 아무리 잘못이라고 해도. 잘못이 아니란다.
그래도 아무튼 내일 사과는 해야 된다고 그랬다.

그 여자분도 무지 술 분위기 좋아하면서도 삐짐쟁이라서 아마 두고두고 내게 칼 갈고 계실 것 같다. 내일 얼른 가서 사과해야지.

그냥 아무말 없이 화장실 가는 척하고 집에 갔어도 내게 사회적으로 아무 불이익 없었을 텐데. (울 회사나 울 팀이나 울 팀장님이나 술 가지고 불이익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 때문에 사람들이 그거 수습해 보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는 게 좀 미안하기도 했다.

세상에는 술 먹으면서 스트레스 푸는 사람도 있고 나처럼 술 먹는 사람 못 마땅하게 바라보면서 비수 한 번 찌르면서 스트레스 푸는 사람도 있나보다.

예전에도 내가 초등학교, 중학교 때 싸움도 못하면서 가끔 우리 반에서 제일 싸움(주먹질) 잘하는 친구한테 말 싸움 걸고 그랬는 데.

가끔 나도 객기가 나오는 것 같다.
그들의 객기에 못 마땅해서 내 객기가 한 번 나왔구나.
푸~
아무튼 말 한마디로 사람들에게 비수를 찌르는 악독한 재주를 타고난 모양이다.

내 딴에 변명을 하자면 팀장님들이나 그 여자분이나 술 먹고 죽는 게 너무 안 쓰러웠다. 그들이 아무리 술이 세더라도 그 정도 먹으면 몸 버릴 텐데. 왜 그리 먹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나도 집에 들어갈 겸해서 배후 세력에 공격을 가해서 분위기 깨버렸다.

앞으로는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차라리 그냥 도망가야겠다. 그들이 몸이 버리더라도 스트레스 풀기 위해 먹는 거라면 말릴 수 없지. 모두가 행복한 길은 그들은 그들대로 먹고 나는 나대로 도망가서 일찍 자는 거다.

댓글 1개:

  1. 음. 그래서 내가 신기하게 생각하는 건.



    내가 잘못 했는 데. 사람들이 다들 내 잘못이 아니라고 하는 게 신기하고.



    두번째는.. 나 대신 술을 먹어주면서 자신이 스스로 약한 사람을 도와줬다고 생각하면서 기뻐하는 사람이 있는 게 신기하다. (그런 심리를 이용해서 나는 그가 내 술을 대신 먹게 하고 기쁨을 주는 일종의 공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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