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황이 기회다<中> 현실에 안주하면 망한다
폴라로이드社 디지털카메라 흐름놓쳐 합병당해
일본D램업계 생산라인 증설 주저하다 뒤처져
국내기업 현금보유 작년말보다 13%늘어… 경쟁력 위기
2년 뒤 오 사장은 1700억원의 사내유보금을 갖고서도 경영권 분쟁에서 밀려 낙마(落馬)했다. 주주들과 시장(市場)이 수익창출을 하지 않는 기업가를 혹독하게 평가한 것이다. 새롬 자체도 경영난을 겪다가 올해 초 회사이름을 ‘솔본’으로 바꾸고, 재기(再起)를 노리고 있다. 반면 다음이나 NHN 등은 최근 투자의 결실을 보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치열한 비즈니스 전쟁에서 현실에 안주하는 기업은 버틸 자리가 없다. 미래의 주도권 확보와 효율적인 수익을 위한 투자를 게을리 하면 곧바로 기업의 위기로 직결된다.
최근 국내기업들을 살펴보면 그런 우려가 커지고 있다. 한국상장사협의회는 18일 “지난 6월 말 현재 525개 상장사(12월 결산법인)의 현금성 자산은 24조7799억원으로, 작년 말보다 13%가 늘었다”고 밝혔다. 이익을 재투자하기보다 현금으로 쌓아두는 현상이 심해지고 있다는 얘기다. 그러다 보니 기업들마다 돈줄을 죄는 ‘관리·재무부서’의 파워가 세지고 있다.
‘2000년 2311억→2001년 671억→2002년 135억→2003년 206억원’.
국내 중견 섬유업체인 T사는 불과 4년 만에 설비투자가 10분의 1 미만(8.9%)으로 쪼그라들었다. 회사 관계자는 “2000년대 들어서 발생한 대규모 노사분규 때문에 투자가 위축됐다”고 말했다. 이유야 어쨌든 투자를 하지 않으면 기업의 경쟁력은 사라진다. 김재철 무역협회 회장은 “우리 기업가들이 최근 들어 위험감수(risk taking)가 아닌 위기관리(risk management)에 몰두하면서 현실에 안주하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지난 40여년간 ‘박카스’로 제약업계 1위를 지켜온 동아제약. 하지만 최근 경쟁업체가 내놓은 비타민 음료돌풍 등으로 2002년 5490억원이던 매출이 지난해 4924억원으로 줄었다. 동아제약이 설비투자에 들인 돈은 2001년 297억원, 2002년 234억원, 2003년 107억원으로 줄고 있다. 하지만 회사에 쌓아둔 현금(현금 및 현금등가물과 단기금융상품을 합친 금액)은 같은 기간 291억원, 398억원, 417억원으로 꾸준히 늘었다.
서울대 경영학과 주우진 교수는 “국내기업들이 도전정신을 잃어버리고 현실에 안주하는 경향이 커지고 있다”며 “기업들의 지속적인 성장이 어려울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다.
현실에 안주하다 무너진 사례는 세계 시장에서도 부지기수다.
8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세계 D램 반도체 업계는 일본의 독무대였다. 그러나 4메가 D램 개발부터 생산라인 투자에 2억달러 이상의 거액이 들어가게 되자, 일본 업체들은 투자를 주저하기 시작했다. 이 틈새를 국내 업체들이 파고들었다. 결국 일본 D램 업계는 몰락을 거듭했고, 도시바는 2001년 아예 D램 사업부를 포기했다.
세계 즉석 카메라 시장을 석권하던 미국 폴라로이드는 회사 설립 70년 만인 2001년 다른 회사에 합병되는 비운(悲運)을 맞았다. 폴라로이드는 90년대 초반까지 승승장구를 거듭했다. 그러나 기술력에 대한 자신감으로, 속성 사진과 디지털 카메라에 대한 투자를 소홀히 하다가 무너졌다.
현대차에 포니 엔진 기술을 전해준 일본의 미쓰비시자동차도 투자 시점을 놓쳤다가 최근 오히려 현대차로부터 엔진 기술을 빌려가는 신세가 됐다. 90년대 중반 RV(레저용차) 시장이 뜰 때 미처 투자를 못한 것이다. 결국 2001년 지분 37.7%를 다임러크라이슬러에 매각했고, 최근엔 현대차가 개발한 2000~2500㏄급 중형차 엔진기술을 도입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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