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3월 22일 월요일

[기사]일본 2002년 노벨상 수상자 2인 현지 공동 회견

[일본 2002년 노벨상 수상자 2인 현지 공동 회견]
노벨상을 수상하면 평범한 생활을 포기해야 하는 모양이다. 올해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일본의 고시바 마사토시(小柴昌俊.76) 도쿄대 명예교수는 불편한 다리를 이끌며 강연장을 돌아다니고 있다.

또 노벨화학상 수상자인 다나카 고이치(田中耕一.43) 시마즈제작소 부장은 인사하러 이곳저곳 다니느라 바쁘다. 두 사람은 일정을 맞춰 31일 도쿄(東京)에서 공동 기자회견을 했다.

*** 화학상 다나카 부장

-어떤 점을 인정받아 노벨상 수상자로 선정됐다고 보나.

"이전에도 같은 원리를 개발한 학자들은 많다. 이 원리를 처음 실용화하는 데 성공해 상을 받은 것 같다. 수상 대상이 된 기술은 시마즈제작소에서 나를 포함한 다섯 명이 공동 개발했다. 한 명이라도 실패하면 성공할 수 없는 기술이므로 전원이 공동 수상하는 게 마땅하다고 본다."

-일본 기업들은 사원들의 연구 성과를 제대로 보상해주지 않는다는데.

"보상보다는 평가시스템이 더 중요하다. 나는 실험을 거듭하면서 많이 실패했다. 만일 상사가 연구비를 낭비한다고 깐깐하게 질책했다면 벌써 해고됐을 것이다. 일본 기업은 너무 결과만 따지는 경향이 있는 게 사실이다. 결과를 못내면 인사고과에서 감점이다. 그러나 서구에서는 연구자의 잠재력을 평가하면서 과정을 더 중시한다."

-연구 결과에 대한 보상금을 회사로부터 충분히 받았나.

"별로 못 받았다. 내가 개발한 기술로 회사가 큰 돈을 번 것도 아니므로 당연하다."

-연구 예산은 충분했는가.

"다행히 본격적인 실험을 시작하던 1985년께 회사 형편이 매우 좋았다. 경영진이 3~5년후 써먹을만한 신기술이라면 아무거나 연구해도 좋다며 예산을 쉽게 배정해줬다."

-노벨상 수상자로 선정된 이후 일본에서는 '다나카 붐'이 일고 있다. 생활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나.

"나는 탤런트가 아니다. 가만히 내버려 뒀으면 좋겠다. 빨리 연구실로 돌아가고 싶다."

*** 물리학상 고시바 교수

-일본 정부가 노벨상 수상자 배출 목표제를 도입해 범국가적으로 노벨상 획득에 나선 것을 어떻게 생각하나.

"기초과학에 대한 관심과 지원이 소홀해지고 있는 풍토에서 그렇게라도 해 지 원을 해준다면 나쁘지 않다. 지금 일본의 과학 수준이라면 앞으로도 수상자가 더 나올 것이다."

-일본 대학의 연구 여건은 어떤가.

"미국 대학에서는 교수가 틀리거나 실수를 하면 학생이 서슴없이 지적한다. 이것이 자극이 돼 새로운 발견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반면 일본 대학에서는 교수가 틀려도 모두 입을 다문다. 이런 권위적인 풍토가 문제다. 연구 예산을 따내는 것이 무척 어렵고 따낸 뒤의 사후평가 시스템이 취약하다. 이래서는 연구기획서를 쓰는 데 진을 빼며 결과에는 별로 신경을 안쓰게 된다."

-연구비는 많이 지원받았나.

"내 연구는 정부의 중점 지원 대상이 아니다. 연구비는 3억엔 정도 들었을 뿐이다. 노벨상 수상을 계기로 실용적이지는 않더라도 인류의 지식 증진을 위한 연구를 더 많이 지원했으면 한다."

-영어 구사력이 노벨상 수상에 영향이 있다고 보나.

"일본인으로서는 연구성과를 평가받는 데 장애가 되는 게 사실이다. 미국에 처음 유학갔을 때 '쌀(rice)'을 사려고 아무리 돌아다녀도 '이(lice.蝨)'는 안판다고 핀잔만 들었다. 하물며 과학에서는…."

-보람이 있다면.

"일본 젊은이들이 기초 과학에 관심을 갖도록 자극했다는 점에서 기쁘게 생각한다."

도쿄=남윤호 특파원 yhnam@joongang.co.kr

중앙일보 2002-10-31 18:5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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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올해 노벨 화학상 수상자가 발표됐을 때 이웃나라 일본 국민은 한동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수상자인 다나카 고이치가 석사나 박사학위도 없는 무명의 연구원이었기 때문이었다.

학사 출신으로 연구분야에서 노벨상을 받은 것은 매우 이례적인데다 올해까지 12명을 배출한 일본인 노벨상 수상자 중 민간기업 연구자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의 노벨상 수상은 연구를 위한 고집과 단순한 실수를 놓치지 않는 세심한 관찰력이 이루어낸 결과였다.

1959년 8월 3일 일본 도야마현 도야마에서 태어난 다나카씨는 어렸을 때 작은아버지의 양자로 들어갔다.

친어머니가 그를 낳다가 숨을 거뒀기 때문.

“노벨상 수상보다 더 큰 충격을 받았던 적이 있다.

대학시절 호적을 떼면서 부모님이 양부모란 사실을 알았을 때였다.

어릴 때 알았으면 매우 방황했을 텐데….

따뜻하게 키워주신 양부모님께 너무 감사한다.” 어려운 가정에서 자란 그는 1983년 도호쿠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해 일본의 분석기기 제조회사 인 교토의 시마즈제작소에 입사했다.

그는 대학에 다닐 때는 집안형편이 어려워 밤늦게까지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제대로 수업을 받지 못하는 바람에 한 과목에서 낙제를 받아 1년을 더 다녀야했다.

대학 졸업과 함께 일본의 명문기업으로 불리는 소니 입사시험을 치렀지만 면접에서 떨어지기도 했다.

그의 이번 노벨상 수상 공적은 단백질의 분자크기 측정법 개발.

다나카씨는 분자량을 획기적으로 쉽게 측정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 냈다.

그의 이론을 바탕으로 한 측정법은 대학생 정도면 쉽게 분자 크기를 측정할 수 있게 했다는 격찬을 받았다.

또 이를 기초로 신약개발과 암 조기진단에 크게 이바지하게됐다.

그가 질량분석 원리를 발견한 것은 시마즈제작소 입사 4년 뒤인 87년.

그의 나이 28세 때다.

그의 발견은 우연한 실수에서 비롯됐다.

신참 연구원이었던 그는 금속의 코발트 미세분말과 글리세린을 각각 따로 분석하려고 했다.

하지만 부주의로 글리세린이 코발트 분말에 흘러내려 섞여버리고 말았다.

잘못해서 섞이긴 했지만 다나카씨는 실험물질을 버리기가 아까워 그 상태로 분석을 해봤다.

뒤섞인 물질을 분석해본 다나카씨는 종전 방법으로는 측정불가능했던 새로운 측정방법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됐다.

우연한 실패가 세상을 놀라게 한 대성공으로 이어졌음을 그 자신이 실감한 셈이다.

그는 이 발견을 일본학회에 발표했지만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

이 기술의 개발로 그가 회사에서 받은 돈은 특허등록 때 받은 1만1000엔(약 11만원)이 전부였다.

그는 그 뒤 이 기술을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 피나는 실험을 계속했다.

다른 동료들이 부장·과장으로 승진할 때도 그는 연구에 더 몰두하기 위해 승진시험을 거부했을 정도였다.

그의 이론은 오히려 외국에서 먼저 주목을 받았다.

독일의 한 과학자가 연구논문을 쓸 때 ‘다나카의 원리’라고 소개해 세계에 알려졌고 미국의 존 펜 교수(85)와 스위스의 쿠르트 뷔트리히 박사(64)와 함께 공동수상자로 결정된 것이다.

“지금까지 연구를 하면서 승진이나 보상금은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처럼 수많은 실패에도 좌절하지 않고 한우물만 파온 게 이런 영광을 안겨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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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이틀 연속 기초과학 분야에서 노벨상을 따내는 기염을 토하며 ‘노벨상 개척사’의 신기원을 세웠다. 일본의 NHK방송 등은 9일 저녁 긴급 뉴스로 다나카 고이치 시마즈제작소 분석계측사업부 연구소 주임의 노벨 화학상을 수상소식을 전했다. 다나카 씨의 노벨상 수상은 여러가지 기록을 낳았다. 먼저 일본이 한해에 두 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으며,화학상의 경우에는 2000년부터 올해까지 3년 연속차지하는 금자탑을 세웠다. 또 전날 물리학상을 수상한 고시바 마사토시 도쿄대 명예교수(76)가 처음으로 이론이 아닌 실험을 통해 뉴트리노(중성미자 中性微子)를 관측하는데 성공한 데 이어 다나카씨는 기업 연구원으로서 첫 노벨상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그가 재직중인 시마즈 제작소는 교토에 있으며,계측 및 의료기기 등 정밀기기를 제작하는 회사다. 이번 수상으로 ‘과학입국’ 일본의 위상은 국제사회에서 더욱 높아질 전망이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는 이 날 저녁 노벨상 수상소식을 듣고 “이는 일본을 결코 평가절하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자신을 가져도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장기불황에 주눅 들어온 일본 열도가 모처럼 기초과학의 든든함에 위안을 받고 있는 분위기이다. 도쿄에서 가장 큰 수산시장에서 장사를 하고 있는 한 60세 상점 주인은 물리학상 수상 소식을 듣고 “그가 한 연구가 어떤 내용인지 이해할 수는 없지만 노벨상을 받은 걸 보면 대단한 연구임에 틀림이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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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노벨 화학상을 공동 수상한 일본 다나카 고이치(43)는 평범한 샐러리맨. 그의 이름이 발표되는 순간 일본 열도의 반응은 '도대체 다나카가 누구야?'였다. 박사도 대학교수도 아닌 너무도 평범한 회사 원이 노벨상을 받았기에 놀라는 것은 당연하다.
이제 다나카는 '보통 사람의 노벨상 시대'를 연 주인공으로 세계인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12번째 일본인의 노벨상 수상 소식이 전해진 후 기자회견장에 교토의 정밀기기회사 작업복 차림의 다나카가 나타났다. 세계적인 석학들이 평생을 연구해도 타기 어려운 노벨상을 탄 그는 학사 출신 연구원.

83년 도호쿠대 전기공학과를 졸업한 다나카는 단백질 질량분석기 개 발에 기여한 공로로 노벨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다나카는 수상 배경이 된 자신의 연구가 '우연한 실수에서 시작된 발 견'이라고 밝히며 겸손해했다. 실험중에 잘못 떨어뜨린 용액에서 '위 대한 발견'을 하게 됐다며 노벨상 수상을 '운'으로 돌렸다. 또한 회 사에서 파격적인 승진을 제의했으나 사양해 화제가 됐다.

일본은 너무도 평범하고 솔직한 이 무명의 회사원에게 매료됐다.

다나카 고이치의 성공 스토리는 '재패니즈 드림'의 전형이다. 그는 명문대학이 아닌 지방대학 출신인 데다 대기업 소니의 입사시험에서 떨어지고 중견기업 연구소에서 일하던 평범한 인물이다. 그러나 자신 의 일에 인생을 걸어 최고가 된 그의 이야기는 직업의 귀천을 떠나 한 우물을 파는 일본 '장인정신'의 표상이 되고 있다.

다나카의 질량분석법은 단백질과 같은 고분자 질량 측정에 필수적인 기기인 질량분석기를 만드는 핵심 원리. 신약 개발과 암 조기 진단에 기여했다. 다나카는 이미 87년 단백질 질량분석법을 발견했지만 일본 에선 실용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외면당했다. 그러나 차츰 '다나카 의 이론'으로 해외에 알려졌고 90년대 후반 바이오 기술을 이용한 신 약 개발이 활발해지면서 '핵심 신기술'로 자리잡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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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 승리',무명 기업연구원이 노벨상 수상 - 작업복 차림으로 기자회견, 연구 계속하려 승진도 거부
[속보, 사회, 사설/칼럼] 2002년 10월 10일 (목) 16:20

노벨상 역사상 전례를 찾기 힘든‘신데렐라'가 탄생해 화제다.

9일 스웨덴 왕립 과학원이 올해 노벨화학상 수상자 3명을 선정했다. 이 가운데 미국의 존 펜 교수(85)와 스위스의 쿠르트 뷔트리히 박사(64)와 함께 공동수상자로 뽑힌 일본의 다나카 고이치는(43)는 그 ‘흔한’ 박사 칭호도 없는 무명의 화학자이자, 대학이 아닌 산업현장의 연구원이다.

자그마한 기업의 연구원이 노벨상 수상

다나카의 최종학력은 일본 도호쿠(東北)대 공학부 전기공학과 졸업이 전부다. 그는 지난 83년 정밀기기 메이커인 시마즈제작소에 입사, 생명과학연구소 주임으로 근무중이다. 세계 최고의 과학엘리트와 명문대학 교수들이 휩쓸다시피 해 온 노벨상에 평범한 일반 기업의 연구원도 노벨상을 수상할 수 있다는 귀한 선례를 남긴 것이다.

기업체에 근무하면서 상을 받기로는 물리학상을 받은 미국 에자키 레어나에 이어 두번째 인물이지만, 레어나는 IBM이란 초거대 기업에 근무했었다.

다나카는 펜 교수와 함께 그동안 불가능했던 단백질 등 생물학적 고분자의 구조를 분석하고 증명하는 방법론을 발전시킨 업적으로 수상자로 뽑혔다. 왕립과학원에 따르면 이들의 생체분자 연구는 신약개발을 앞당겼으며, 유방암 및 전립선암의 조기 진단에도 공헌했다.

그중에서 다나카는 기업체 연구원답게 바로 실용화될 수 있는 연구결과를 내놓았다는 점에서도 보기 드문 케이스다. 그는 레이저를 단백질 혼합물에 쬐여 단백질을 분리할 때 나오는 분자를 통해 단백질의 질량을 기존보다 훨씬 간편하면서도 정확하게 측정하는 기법을 개발했으며 바로 실용화시키는 데도 성공했다.

다나카는 노벨화학상을 받았으나 원래 전공은 공학이었다.

어려운 가정에서 자란 그는 도호쿠대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했으며 현재 시마즈 본사 계측사업부에 근무하고 있다. 자신의 연봉이 현재 8백만엔쯤돼 생활에 불편이 없다고 밝힌 다나카씨는 "전문 분야가 아니기 때문에 발상의 전환이 쉬웠고 무(無)에서 출발하니까 오히려 답이 빨리 나왔다"며 겸허하게 자신의 연구업적을 행운으로 돌렸다.

그는 43세에 노벨상 수상자로 결정됨에 따라 42세때 상을 받은 유가와 히데키교수(물리학상, 교토대)에 이어 두번째 최연소 기록도 남겼다.

연구 계속하고 싶어 승진시험도 거부한 채 주임직책 고수

그는 산간벽지인 도야마현에서 고교를 졸업한 뒤 국립명문대이긴 하지만 센다이에 자리잡은 도호쿠대를 거쳐 교토의 시마즈회사에 몸담아 왔다.

다나카는 수상소식이 전해진 후 하늘색 작업복 차림으로 기자회견장에 뒤늦게 도착한 그는 “회사에서 회의를 하느라 시간에 대지 못했다”며 "노벨상 받을 줄 미리 알았으면 정장 차림으로 왔을 텐테 미안게 됐다"를 멋적어 했다. 그는 수상자로 결정됐다는 전화를 받았을 때 "영어로 노벨상 어쩌구 하며 축하한다는 말을 하기에 진짜 노벨상이 아니라 또 다른 노벨상이 있는 줄 알았다"고 말하면서 "전혀 생각지도 못해 웬일인가 했다"며 얼떨떨해 했다.

그러나 그는 "주위에 별난 사람으로 알려질 정도로 엉뚱한 실험을 자주해 왔다“며 ”기존 실험보다 실패할 확률은 높았지만 이같은 시도가 좋은 결과를 내 기쁘다"고 말했다.

위대한 과학적 발견들이 대체로 우연한 실수와 연관이 되어 있듯 다나카도 실험중 잘못 떨어뜨린 용액에서 위대한 발견이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회사 동료에 따르면 다나카씨는 자신만의 연구를 계속 하고 싶어 회사 승진 시험을 거부한 채 주임 직책을 고집해 왔다.

경제불황으로 의기소침해 있는 일본사람들은 전날 고시마 마사토시 도쿄대명예교수가 노벨물리학상에 선정됐다는 소식에 이어 일본 역사상 처음으로 한 해에 두 명이나 노벨상 수상자가 배출되자 “과학 일본의 승리”라면서 모처럼 활기찬 모습을 보였다.

'장인'이 노벨상을 수상하는 시대가 왔다. 세상이 분명 바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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