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진짜 전쟁이나 밥을 굶을 정도로 가난해본 적은 없지만,
어렸을 때 그런 이야기는 너무도 많이 들었던 것 같다.
항상 외가에 가면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께서 일제시대나 6.25 이야기를 하셨는 데,
역사를 잘 몰랐기 때문에 어느 시대인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항상 섞어서 말을 하셨다.
. 일제시대
외할아버지께서는 징용에 끌려가셨는데, 다행히도 일본으로 가는 배에 실려가기 전날 광복이 되서 무사히 돌아오셨다고 한다.
외할머니는 아주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자마자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오빠와 함께 살았는 데, 너무 먹지 못해서 살도 빠지고, 결혼 전에 이미 치아도 모두 잃어버리셨다. 그래서 평생 틀니를 하고 계신다.
반면에 친가의 증조할아버지는 돌아가셔서 재산도 몰수되고 할아버지와 큰할아버지는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서 평생 가난하게 사신 것 같다.
. 6.25
외할아버지는 그 때 경찰이셨는 데, 소설 태백산맥을 보면 낮에는 우익이 밤에는 좌익(빨치산)들이 세상을 다스리는 혼란의 시기라서 둘 중 어느 한쪽에라도 찍히면 죽을 수 있었다. (외가는 소설의 배경이 되는 지역에 있다.)
할아버지는 당연히 경찰이니까 빨치산이 점령하는 시기에는 상당히 위험했는 데, 그 때도 다행히 제주도로 피난을 가서 목숨을 구하셨다.
사람이 숨어 있을만한 모든 곳은 다 뒤지고, 음식도 가져가고 죽창으로 이곳저곳 찌르기도 했단다. (쌀가마니라든지, 볏짚더미 등..)
. 여명의 눈동자
채시라 등이 스타가 된 드라마인데, 빼먹지 않고 다 본듯하다.
끔찍한 장면들이 너무 많았다. 꼬마를 호빵으로 꼬셔서 마루타로 사용한 일본군의관도 있었고.. 채시라는 종군위안부 역으로 나왔고.
. 박정희 정권
최근에는 외할아버지께서 박정희 정권시절도 이야기를 하신다.
어렸을 때는 별로 그 때 이야기는 안하시는 것 같았는 데.
(언론의 자유도 적었고, '국가원수모독죄' 같은 죄목도 많이 남아있고, 군부사람들이 노태우 시절까지 대통령과 주요 장관직에 있었으니까.)
요즘은 가끔 하신다. 면장님이셨는 데, 중앙에서 이것저것 자유를 침해하는 많은 명령들이 있었단다. 국가 발전이 먼저라서 재산권도 잘 안 지켜주고 말이지..
그리고 아버지는 그 때 대학에 가고 싶으셨는 데, 집에서 안 보내줘서, 1주일간 단식투쟁을 했으나, 역시 없는 살림에 대학에 보낼 수는 없었다.
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 졸업 때까지 보릿고개 같은 이야기를 많이 하셨다.
밥을 안 먹거나 과자, 장난감을 사달라고 조를 때마다 하루종일 그 이야기를 들었다.
. 월남전
큰아버지가 참전하셨다는 데, 큰아버지는 별로 친하지 않으니 직접 듣지는 못했고, 미국드라마 '머나먼 정글'을 매주 봤다. 지뢰밭을 걷는 장면과 빨치산이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공포가 강렬했다.
. 걸프전
CNN에서 방송하는 걸 국내에서도 많이 중계했었는 데, 우리나라도 위험한 건 아닌지 괜히 걱정됐었다. 주로 패트리어트 미사일이 밤하늘을 가르며 바그다드로 떨어지는 뭐 그런 장면만 계속 봤지만..
. 체벌
40~50대의 많은 중학교 선생님들이 체벌을 할 때 항상 일제시대나 군대의 고문을 언급하시곤 했다. 일제시대 일본인 교사들은 허리에 칼을 차고 있었는 데, 말을 안들으면 칼로 벨수도 있었다라든지, 365가지 고문법을 배워서 매일 한가지씩 체벌하면 너희들(우리 학생들)을 1년내내 힘들게 할 수 있다든지.
아버지도 항상 군대의 체벌 이야기를 많이 하셨다.
산에 가든, 추운날이든, 아주 더운날이든.. 힘든날은 언제나 군대.
. 군대
초등학교 때 나는 군대가 정말로 무서웠다. 어른들의 무시무시한 전쟁이야기나 얼차레이야기를 들으면 나도 그런 것을 겪을 것 같았으니까.
. 5.18
초등학교 때까지 광주 시내에서는 참 데모를 많이 했다.
최루탄이 매워서 눈밑에 치약을 발라보기도 하고 양초도 켜보고.
가끔은 시내에 있는 학원에 가는 버스를 탔다가 데모하는 날이면
버스가 시내에 못 들어가서 그냥 돌아오기도 했다.
그리고 중학교에 가니 5.18 진상이 알려지면서 5.18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 데,
거의 내전이나 마찬가지였다.
5.18 추모 백일장 대회에 한 번 나갔기 때문에 망월동 국립묘지도 가봤었고, 꽤 많은 이야기와 사진들을 보게 됐다.
. 다른 영화, 드라마, 소설들
'김의 전쟁', '토지', '태백산맥', '영웅시대', '장군의 아들', '머나먼 정글', '꽃잎', '모래시계'
왜 이런 것들을 나열해봤냐면 정신분석학적으로 내가 가지는 공포의 근원이 무엇과 연결되어서 연상되어지는 지 찾아보기 위해서이다.
고등학교에 들어온 뒤로는 기숙사 생활을 시작하면서 위 소재들에 대한 노출시간이 매우 줄었는 다. (어른들과 살지 않고 친구들과 살았고, 입시때문에 과학을 주로 공부했으니까.)
그래서 공포감이나 심적 스트레스시에 저런 것들이 더 이상 연상되지 않지만 여전히 근원에서는 저것들이 한 번 더 추상화되고, 변형된 형태로 남아있다.
저런 것들이 근원이라는 것을 깨닫고 소거(행동심리학적 조건형성의 제거)를 시키기 위한 노력을 해야겠다.
죽음에 대한 공포나 공포영화를 보았을 때도 저것들이 연결되서 더 고통스러웠던 것 같다.
그리고 저 위의 문제들을 반복적으로 언급하는 어른들도 매우 고통스러울 텐데,
옆에서 간접경험을 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싫다. 제발 저런 이야기를 계속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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