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8월 13일 토요일

[경제]국민연금과 폰지게임

[한겨레] 국민들의 불신이 하늘을 찌르는 국민연금의 ‘사기극’ 논쟁… 정부는 온통 연금재정 확충에만 신경 정남구 기자 jeje@hani.co.kr 연금제도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폰지’ 이야기다. 1920년대 미국 보스턴의 유명한 사기꾼 ‘찰스 폰지’는 “돈을 맡기면 개발사업에 투자해 90일 안에 2배로 돌려주겠다”며 투자자들을 끌어들였다. 그에게 돈을 맡긴 투자자들은 처음에는 큰돈을 벌었다. 투자자들은 폰지에게 더욱 몰려들었다. 8개월 만에 그에게는 250만달러가 모였다. 그러나 폰지는 수익사업을 한 것이 아니었다. 단지 뒤에 투자한 사람들에게 돈을 받아 앞서 투자한 사람들에게 수익금을 주고, 나머지는 자신이 챙겼다. 그런 사기극은 오래갈 수 없었다. 사기극이 유지되려면 투자자가 계속 빠른 속도로 늘어야 했지만, 그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논란 폭발시킨 ‘국민연금의 비밀’ 오늘날 ‘폰지게임’이란 용어는 폰지가 했던 것처럼 빚을 갚기 위해 또 다른 빚을 내는 금융거래를 반복하는 것을 말한다. 일반적인 경제상황에서 폰지게임은 지속되지 못한다. 그런데 폰지게임이 성립할 수 있는 극히 이례적인 경우가 있다. 바로 ‘연금’이다. 후세대의 돈을 앞선 세대에게 미리 지급하고, 후세대의 것은 그 후세대가 지급하도록 하는 것이 연금제도다. 연금제도는 매우 엄밀한 조건 아래서 지속 가능한 폰지게임이다. 연금 가입자들이 완전한 정보와 합리성을 갖추고, 연금운용자인 정부를 신뢰하고, 연금 가입 인구의 증가율이 이자율과 같거나 그보다 높은 경우이다. 이런 조건을 갖추지 못할 때 연금제도는 ‘사기극’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크다.

1988년 도입된 한국의 국민연금제도는 어떤가? 지금 보면 대부분의 가입자들이 연금제도를 불신하고 있다. 지난 5월18일부터 인터넷 사이트 네이트가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는 ‘국민연금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지적이 91%에 이르렀다. 야후 사이트에서는 ‘국민연금 납부거부 운동에 찬성한다’는 대답이 88%나 됐다. 국민연금에 대한 불신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지난해 8월 문화방송 라디오 프로그램인 <손에 잡히는 경제>가 리서치 전문회사인 엠브레인과 함께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도 85%가 “국민연금을 해지하고 싶다”고 대답한 바 있다. 젊을수록, 사무·전문직일수록 불신의 정도는 심했다.

최근 국민연금을 둘러싼 논쟁은 지난 5월5일 네이버의 토론장에 ‘mariavet2000’이란 아이디의 네티즌이 ‘국민연금의 비밀’(이하 비밀)이란 글을 올리면서 시작됐다. 논쟁은 인터넷에서 신문으로 옮겨지더니 급기야 방송국들이 토론회를 열어 중계하기까지 할 정도로 확산됐다. 결과는 보건복지부의 항복이었다. 보건복지부와 국민연금관리공단은 5월27일 ‘최근 국민연금 논란에 대한 정부의 입장’이란 자료를 통해, “제도 보완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보건복지부는 ‘비밀’이란 자료에 담긴 불만사항이 “대부분은 제도의 성격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강조하면서도, “일부 제도 개선이 필요한 사항이 있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이것으로 상황이 끝난 것은 아니다. 국민연금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은 오히려 더욱 뿌리가 깊어졌기 때문이다.

‘비밀’은 국민연금의 수급권 제한에 대한 불만이 주를 이룬다. 대표적인 것이 배우자의 사망 때 유족연금과 본인의 연금을 같이 받을 수 없다는 점이다. “부부가 맞벌이를 하면서 각자 국민연금 보험료를 내고, 나이가 되어 연금혜택을 받으려 했지만 아쉽게도 배우자가 사망했다면? 배우자의 유족연금을 받든지 아니면 자기가 낸 연금을 받든지 많은 것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즉, (유족연금을 받는다면) 아내가 낸 연금은 국민연금에서 꿀~꺽 합니다. 원금도 못 받죠.” 보건복지부의 ‘바로알기’는 이에 대해 “남녀 모두가 소득활동을 많이 하는 외국에서는 유족연금을 아예 없앤 경우도 있다”며 “사회보험의 일반적인 원칙은 한 사람에게 급여가 집중되는 것을 방지하여 더 많은 사람들이 골고루 혜택을 누리도록 하는 것”이라고 해명했다.

“병급 금지는 행정편의적 발상” 그러나 ‘비밀’의 필자가 제기한 수급권 제한 문제는 오해가 아니라, 비판이 제기될 충분한 근거가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본인이나 배우자의 유족연금이 소액인 경우에도 하나만 선택하도록 하는 것은 ‘급여가 집중되는 것을 막는다’는 취지와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인제대 사회복지학과 이정우 교수는 “단도직입적으로 병급을 금지하는 것은 지나치게 행정편의적인 발상”이라며 “독일의 경우는 병급을 하되 합산액이 일정액을 초과하면 초과액에 대해서는 감액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보건복지부는 수급권 제한과 관련한 다양한 비판을 수렴해 ‘제도개선안’을 내놓았다. 우선 재혼자의 분할연금 지급정지 제도를 폐지해, 이혼한 배우자의 분할연금을 노령연금과 함께 받을 수 있도록 하기로 했다. 또 조기 노령연금 수급자가 65살 이전에 월 42만원 이상의 소득활동에 종사하는 경우 64살까지 소득활동 기간 동안 조기 노령연금의 급여를 정지하던 것을, 앞으로는 60살 이후에는 소득활동을 해도 일부 연금을 지급하기로 했다. 이런 조처들은 국민연금에 대한 비판이 단순히 제도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님을 보건복지부가 인정한 결과다.



논란의 소지가 있는 것은 ‘월 360만원 이상 버는 사람은 똑같은 액수의 보험료를 낸다’는 점이다. ‘비밀’의 필자는 “이것이 국민연금에서 말하는 소득재분배냐”고 따져묻고 있다. 현행 국민연금제도는 소득재분배 기능을 부분적으로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가입자가 받을 수 있는 연금액은 균등부문(연금수급 전년도 가입자 전원의 표준소득월액의 평균치)과 소득비례부문(가입자 개인의 가입기간 중 표준소득월액의 평균치)을 모두 감안해 계산된다. 지난 1999년 법 개정 이전과 비교하면 소득비례부문이 커지면서 연금의 소득재분배 기능은 약화됐지만, 여전히 소득재분배 기능이 들어 있다.



하지만 이는 같은 세대 안에서이다. 현 우리나라의 국민연금제도는 보험료를 낸 것보다 더 많은 액수의 연금을 받게 돼 있고, 현 세대가 후세대에게 부담을 지우는 방식으로 설계돼 있다. 고소득자에게 더 많은 보험료를 내게 하면 같은 세대 안에서는 소득재분배가 이뤄지지만, 후세대에게 훨씬 많은 부담을 떠안기는 문제점이 생긴다. 그런데도 국민연금 가입자들이 고소득자의 보험료가 낮은 것을 문제 삼는 것은 연금제도에 대한 불신의 골이 얼마나 깊은지를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불신은 정부가 자초한 것이다. 지난 1988년 국민연금제도를 처음으로 도입할 당시만 해도 국민연금의 부담률은 3.0%(근로자 1.5%, 사용자 1.5%)에 그쳤다. 월 수급액(소득대체율)은 가입기간 평균소득의 70%에 이르렀다. 폰지의 사기극보다 훨씬 심한 사기극의 구조였지만, 연금을 탈 사람이 적어 당장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제도는 1999년 대대적인 수술을 거쳤다. 소득대체율을 60%로 낮추고, 연금을 타는 나이도 애초 60살에서 2013년부터 5년에 1살씩 높여 최종적으로 65살로 올렸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정부는 “이대로 가면 2047년이면 적립금이 바닥난다”며, 지난해 새로운 법 개정안을 만들었다. 연금 재정의 안정화를 위해 현행 9%인 보험요율을 2010년부터 2030년까지 단계적으로 15.9%로 올리고, 60%인 소득대체율은 2008년까지 50%로 줄인다는 것이다.

공평하게 거둬지고 있는가 물론 재정을 개선하지 않아 소득적립금이 바닥난다고 해서 그 이후 연금 수급자들이 연금을 받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연금보험료는 계속 거두게 되는데, 그 돈으로 지급액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결국 부족분은 정부 재정으로 메워야 하는데, 그러기 전에 연금제도를 손질하자는 게 정부의 법 개정 취지다. 사실 연금제도는 오늘날의 고령화 현상을 제대로 감안하지 못한 채 설계된 측면이 있다. 후세대가 안정적으로 앞세대를 부양할 수 있다는 전제에서 만들어진 것이 연금제도인데, 고령화로 노인세대의 비중은 늘어나는 반면 인구증가율은 낮아지고 있다. 세계 각국에서 연금제도가 수술대에 오르고 있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세계 주요국 가운데 인구 고령화 속도가 가장 빠른 한국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연금재정의 안정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데는 동의하면서도 많은 이들이 정부가 제시하는 국민연금 재정추계를 불신한다. 지나치게 장기간에 걸쳐 연금재정을 추계하고 있어 정확성이 떨어지는데다, 또 지나치게 낮은 최근의 출산율을 적용해 재정이 곧 바닥난다는 데만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다. 진주산업대 송원근 교수는 “추계는 과장돼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정부가 연금재정 확충에만 지나치게 신경을 쓰면서 국민의 불신을 더 키우고 있다”고 지적했다.

불신의 또 다른 이유는 보험료가 공평하게 거둬지지 않고 있다는 데서 유래한다. 소득이 투명하게 노출되는 임금근로자들의 처지에서 보면 자영업자들은 지나치게 적은 보험료를 내는 것으로 보인다. 국민연금의 소득재분배 기능에 의해 저소득층으로 분류된 사람은 훗날 낸 보험료보다 훨씬 많은 연금을 받게 된다. 그럼에도 국가의 가입자 소득 파악 능력은 현저히 떨어지고, 이 능력을 높이려는 시도 또한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 연금재정이 투명하게 운영되는지에 대한 불신도 적지 않다. 현재 기금운용위원회 21명 중 가입자 대표가 12명이나 포함돼 있지만, 대부분 가입자의 대표성을 담보하지 못한다. 정부는 법 개정안에서 기금운용위원회를 전문가 중심의 9명으로 구성해 상설화하기로 했지만, 그것으로 기금운용의 독립성이 보장될 것인지는 아직 미지수다.

노동계는 무엇보다 국민연금법 개정으로 급여액이 줄어들 경우, 국민연금이 노후보장 수단으로 제구실을 하지 못할 것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그래서 적극적인 국고 지원을 요구한다. 송원근 교수는 “정부의 재정 여건이 이를 감당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하지만, 국민연금법을 고치는 데 대한 불만은 기본적으로 우리 사회에 사회보장이 너무 적다는 점에 있다”고 지적했다.

http://news.naver.com/news/read.php?mode=LOD&office_id=036&article_id=0000005288
http://cafe.naver.com/propension.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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