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의 일이다. 학교를 졸업하고 회사 생활을 시작한지 채 3년이 안됐을 때 필자는 직장을 옮겼다. 삼성전자라는 곳을 그만 두고 LG전자(그 당시 이름은 금성사)라는 곳으로 옮기면서 참으로 여러 가지 신경쓸 일이 많았는데, 특히 대기업 사이에 ‘동종 업계로의 전직 금지’라는 강제 규정이 머리를 아프게 만들었다.
무조건 금지한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만약 상대방 회사가 이의를 제기한다면 그것을 받아들인다는 식으로 각 회사 사이에 일종의 협조 체제가 형성돼 있었던 것 같았다. 그래서 사표를 제출한 후에는 은근히 그런 쪽으로 무언의 압력같은 것도 있었지만, 전혀 중요할 것 없는 한 평연구원의 전직에 시비를 걸지는 않아서 자연스럽게 결말이 날 수 있었다.
이렇듯 필자의 경우에는 골치 아픈 경험을 하지 않았지만 동기나 후배의 후일담, 혹은 그 외의 사람들이 회사를 옮기면서 어떤 쓰라린 맛을 겪었는지에 대해서는 상당히 많은 얘기를 들었다. 필자의 학교 후배중 하나는 비교적 규모가 큰 소프트웨어 개발 및 수입 회사에 근무하던 중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회사를 옮기기로 결정했다. 그 후배는 연봉과 직급에 대한 내용을 모두 협의한 뒤에 기존 회사에 사표를 던졌다.
회사에선 감언이설과 함께 협박을 해댔지만, 후배는 그걸 무릅썼고 결국 예정된 날짜에 새 회사에 출근했는데, 그만 한 순간에 낙동강 오리알이 돼버렸다. 예전 사장이 벌써 새로 갈 회사에 손을 써서 후배를 채용하지 않도록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그후 후배는 할 수 없이 기존 회사에 눌러앉아 있다가 나중에 또 다른 회사를 찾아 옮겼지만, 그때는 절대 누구에게도 어느 회사로 간다고 알리지도 않았고, 아예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시골 가서 조용히 살려고 한다고만 했다.
필자보다 한두 살 더 나이가 많은 대기업의 중견간부가 있다. 그는 이동통신 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기 때문에 회사 연구소에서도 꽤 중요한 인물로 간주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어느 날 들어온 소식은 바로 그가 외국계 이동통신 업체로 전직하려고 사표를 냈다는 말이었다.
업무상 그 회사를 방문했을 때도 그는 보이지 않았고 새로 업무를 맡은 사람은 물론 어느 누구도 그가 어느 회사로 옮기려는지 알지를 못했다. 위에서 거론했던 필자의 후배와 같은 사태를 예방하려고, 그 역시 누구에게도 얘기하지 않았고 조용히 잠적한 채 새 회사로의 출근 날짜만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한달 쯤 후에 다시 그 회사를 방문할 일이 있었는데, 세상에 그를 만난 것이다. 필자는 그가 그만두었던 것도 모른 척하고 그냥 인사만 하고 지나쳤지만 나중에 다른 이에게서 그의 사연을 들을 수 있었다.
그 회사측에는 아마 그런 중요한 연구원의 전직에 대비하는 부서와 담당자가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과연 어디로 옮겨가는지 알아내기 위해 이런 저런 노력을 기울였는데 집의 식구에게도 회사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새 회사의 사무실 전화번호는 알려주었고 예전 회사에서는 마치 그가 가입돼 있는 보험사에서 전화를 건 것처럼 가장하여 회사 전화번호를 알아냈다고 한다. 그쯤 되면 게임은 끝난 것 아닌가? 그 대기업의 고위층에서 손을 쓰는 바람에 그 사람은 결국 예전 회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필자가 아는 이동통신 분야의 또 다른 연구원은 다른 업체로 옮긴 것은 아니고 함께 일하던 몇 명이 모여 벤처 기업을 세웠는데 예전에 일하던 회사에서 손을 쓰는 바람에 문닫을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다행히 얼마 전에 소식을 들으니 미국계 회사로 취직하여 미국에서 근무하고 있다고 한다. 이밖에도 회사를 옮기면서 여러 가지 문제를 겪은 경우를 보면, 이 바닥에서 일하면서 정말로 회사 옮기기 힘들구나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얼마 전 신문 기사에는 이런 종류 해프닝의 최신판 이야기가 실렸다. LG전자가 자기 회사에서 근무하다 팬택으로 옮겨간 5명의 휴대폰 개발 연구원을 상대로 영업비밀 침해 행위 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고 법원에서는 이 주장을 일부 인정해 1년간 이직 금지결정을 내린 것이 그 이야기의 시작이다.
LG전자에 입사하고 퇴사할 때 1년 이내에는 동종업계나 경쟁업체에 취업하거나 영업비밀을 유출하지 않겠다는 서약서에 도장을 찍은 것이 그 근거라고 한다. 하지만 팬택은 법원 판결이 내린 후에도 한동안 직원들을 출근시키다가 며칠 전에서야 비로소 퇴직 절차를 밟기 시작했다고 한다.
필자가 보기에는 LG에서는 이 정도면 기존 사원들에게 경종을 울리겠다는 소기의 목적을 충분히 달성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흔히 말하는 ‘시범케이스’가 된 셈이다. 팬택도 마찬가지로 옮겨온 사원들은 물론 앞으로도 비슷한 식으로 입사하려는 경력자들에 대해 충분히 보호했다는 명분을 가지려고 노력한 셈이다. LG라는 더 큰 기업 앞에서도 기가 꺾이지 않았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할지도 모른다. LG로서는 ‘너 참 컸구나’라는 말을 하고 싶을 것이다.
참으로 이상한 일은 필자가 HP에 근무하던 시절에 겪은 것이었다. 한국HP 소속이긴 했지만 실제 근무는 미국 실리콘 밸리에서 더 오래 했었는데, 거기서도 동종 업계는 물론 경쟁사에서 옮겨온 사람도 보이고 또 그 회사로 옮겨가기도 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었다. 그런데도 우리같은 문제가 발생하는 것을 거의 볼 수 없었다. 물론 중요한 업무를 하던 사람이 갑자기 그만두는 바람에 프로젝트 일정에 차질이 생기는 일은 있었지만, 다른 연구원이나 매니저들의 반응은 그저 ‘어쩔 수 없는 일이니 최대한 빨리 새 사람을 찾자’는 것이었다. 정말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아무튼 그곳의 풍토가 그러하니까 다들 그처럼 회사를 옮겨 다니는 시스템을 인정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또한 어느 정도 이상의 규모가 있는 회사에서는 다른 회사의 비밀스런 사항을 알고 있는 사람이 와서 그런 비밀을 풀어놓으려고 한다면 오히려 ‘그러면 큰 일 난다’고 못하게 막는 분위기였다. 가령 설계도같은 것에 회사의 비밀사항이라고 적혀 있는 것을 다른 회사가 가지고 있을 경우에는 정말로 큰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 피닉스같은 회사가 IBM PC와 호환되는 ROM BIOS를 처음 만들 때는 IBM의 PC 테크니컬 매뉴얼의 소스코드를 접한 적 없는 사람만 따로 뽑아 격리하여 일을 시켰다는 일화도 있고, 또 AMD에서 인텔 호환 칩을 처음 만들 때도 마찬가지로 인텔 칩을 다뤄본 적이 없는 사람들만 모아서 인텔의 칩 규격표만 보고 리버스 엔지니어링하여 만들었다는 잘 알려진 이야기도 있다. 그만큼 엄격하게 처벌이 이뤄진다면 굳이 동종업계로의 전직금지를 입사 서약서에 넣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싶다.
HP에서는 회사를 그만 둘 때 회사에 반드시 넘겨야 하는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연구노트였다. 모든 연구원에게 지급되는 이 연구노트에는 페이지 번호가 미리 매겨져 있는데 나중에 연구 행위같은 것이 법정에서 증거로 필요할 때 연구노트의 내용이 증거로 채택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또 개발상의 중요한 내용에 대해서는 자신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사인도 함께 넣도록 권장되고 있기도 하다.
사실은 대기업보다는 오히려 소규모 업체나 벤처 기업들이 인력의 동종업계 이전에 대해서 더 민감할 것이다. 핵심 사항의 개발을 하는 인원은 한두 명밖에 없는 회사에서 그들이 갑자기 없어지면 어떻게 하겠는가. 대기업에서야 문서를 중요시 하므로 후임자가 받을 수 있는 자료가 어느 정도 있겠지만 몇 명이 머리를 맞대고 일하는 곳에서는 담당자가 없어지면 심한 경우에는 회사가 기우뚱할 수도 있는 일이다.
또한 소규모 업체에서 개발한 아이디어를 대기업에서 가로채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법적으로도 처리하기 어려운 우리의 상황에서는 정말 어렵다. 그런 대기업들이 몇몇 인력의 이동에 대해 그처럼 행동하는 것은 꽤 심하다고 할만하다.
어쨌든 이제 팬택을 퇴직하는 전직 LG 연구원들은 하나 둘 재입사 절차를 밟게 될 것이다. 그 5명 가운데 가장 먼저 그만 둔 사람이 작년 7월이었으니, 1년이라는 금지 기간이 다 지나서이다. 결국 두 회사가 기 싸움을 하는 것뿐이었고 결과적으로는 별로 달라질 것이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자칫하면 회사를 옮기려는 개인은 공중에 붕 뜨는 일도 생기곤 한다. 정말 대기업의 이런 동종 업계 전직 금지라는 규정은 계속 있어야 하는 것일까. 국가와 기업의 운영 시스템이 제대로 돌아간다면 없어져도 될 사항이 아닐까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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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각에도 경험상 우리 나라 기업에서 근무할 때는
회사에 나의 휴가 계획이나 아무튼 어떤 사적인 계획, 일정,
이직 시기나 장래 희망이나 목표, 야망 등은 알리지 않는 게 좋다.
뭘해도 딴지걸고 보수적으로 나오고
뭐든 못하게 하는 경우도 있다.
별로 안 바쁜 데도 미리 며칠 뒤에 쉬겠다고 말해두면
일감을 늘려서라도 못 쉬게 한다.
미리 이야기해두면 서로 준비하고 대비할 수 있는 데,
그들의 대비는 내 일을 줄여주는 게 아니라
압력을 가해서 못 쉬게 만드는 것일 때가 더 많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쉴때도 기습적으로 쉬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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