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터게이트사건 [ Watergate Affair ]
1972년 6월 대통령 R.M.닉슨의 재선을 획책하는 비밀공작반이 워싱턴의 워터게이트빌딩에 있는 민주당 전국위원회 본부에 침입하여 도청장치를 설치하려다 발각·체포된 미국의 정치적 사건.
이 사건으로 인하여 닉슨정권의 선거방해, 정치헌금의 부정·수뢰·탈세 등이 드러났으며 1974년 닉슨은 대통령직을 사임하게 되었다. 당초 닉슨은 도청사건과 백악관과의 관계를 부인하였으나 진상이 규명됨에 따라 대통령보좌관 등이 관계하고 있었음이 밝혀졌고, 대통령 자신도 무마공작에 나섰던 사실이 폭로되어 국민 사이에 불신의 여론이 높아져 갔다. 1974년 8월 하원 사법위원회에서 대통령탄핵결의가 가결됨에 따라 닉슨은 대통령직을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임기 도중 대통령이 사임한 것은 이것이 역사상 최초의 일이었으며, 미국 역사에 오점을 남기는 사건이기는 하였으나, 의회와 최고재판소가 그 직책을 완수함으로써 민주주의의 전통은 수호되었다. 그리고 닉슨 사임 후에도 그의 형사책임을 추궁할 것인가 아닌가의 문제가 남아 있었으나 대통령 G.포드가 9월 8일 닉슨의 재임기간 중의 모든 죄에 대하여 특사를 발표함으로써 이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이용호게이트 [ 李容湖- ]
2001년 7월, G&G구조조정(주) 회장 이용호(李容湖)의 주가조작 사건 때 검찰이 이용호를 불입건하면서 불거진 일련의 로비 의혹사건.
언제 : 2000년 7월부터 2001년 10월까지
누가 : 이용호
무엇을 : 이용호의 로비 의혹
어떻게 : 이용호에 대한 검찰의 불입건과 주가조작 과정에서 검찰 고위층 및 국세청, 국가정보원, 정치권 등 핵심 권력기관의 인사 상당수가 개입되었다는 의혹 제기
사건의 발단은 이용호 회장이 1996년 이후 인수한 기업들의 주가가 크게 오르자, 자금 출처 등에 대한 정치권의 연루설 등이 나돌기 시작하면서부터다. 2000년 4월, 금융당국이 이상 기류를 감지하고 이용호에게 경고하기도 하였으나, 이용호는 오히려 '금융당국이 건전한 기업인을 죽이고 있다'며 반발하고 나섰다.
같은 해 5월 검찰이 영장을 청구했을 당시, 이용호는 증권거래법 위반죄, 부정수표 단속법 위반, 사기·횡령·배임 등의 혐의로 이미 29회에 걸쳐 수사기관의 조사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 사건이 이용호 개인의 단순한 주가조작 및 사기사건으로 그치지 않고, 그의 주가조작과 관련해 검찰 고위층, 국세청과 금융감독원, 국가정보원, 정치권 등 핵심 권력기관의 인사 상당수가 직접·간접으로 연루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사건은 일파만파로 확대되었다.
먼저 2000년 7월, 서울지방검찰청 특수부가 이용호를 불입건한 데 대한 의혹이 제기되었을 당시만 해도 로비의혹은 일부 검찰 간부에만 국한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2001년 9월부터 이에 대한 수사가 본격화하면서 로비 범위가 과연 어느 정도일지 모를 만큼 의혹에 의혹이 꼬리를 물었다.
첫째 국가정보원의 보물선 인양사업 정보 유출로 인해 보물선 관련 주가가 급등함으로써 이용호가 막대한 차익을 올렸다는 점, 둘째 여권 실세와 친분 관계를 이용한 정치권의 로비가 있었다는 점, 셋째 이용호 구속 당시 친분 관계를 통한 수사 무마를 청탁하는 과정에서 검찰 고위인사가 개입했다는 점, 넷째 금융감독원과 국세청이 이용호의 계열사에 대해 편의를 봐주었다는 점, 다섯째 해양수산부가 과대평가된 보물선 인양사업의 사업성을 묵인해준 점, 여섯째 이용호가 인수한 리빙텔레비전이 한국마사회의 경마중계권을 독점하고 있다는 여러 의문이 제기되었다.
결국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대검찰청에 특별감찰본부라는 새로운 기관이 등장하였다. 2001년 10월 12일, 특별감찰본부는 조사 결과를 발표하였는데, 이 조사 결과 역시 많은 의혹을 해결하지 못한 채 일단락되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용호의 불입건에 관여한 임휘윤(任彙潤) 부산고등검찰청장과 임양운(林梁云) 광주고등검찰청 차장이 징계 대상이지만 사표를 제출함으로써 종결되고, 이덕선(李德善) 군산지청장은 직권 남용 혐의로 불구속 기소되었다.
여권 실세와의 친분 관계를 이용한 정치권의 로비 의혹은 박병윤(朴炳潤)·강운태(姜雲太)·조홍규(趙洪奎) 등 전현직 의원의 접촉만 확인되었고, 후원금의 대가성 여부, 아태재단과 여권 실세의 개입 여부 및 자금 사용처 등은 확인되지 않았다. 특히 김형윤(金亨允) 전 국가정보원 단장과 이형택(李亨澤) 예금보험공사 전무가 이용호에게 보물선 금괴 인양사업을 소개한 경위에 대해서 수사가 이루어지지 않음으로써 이용호의 로비에 대한 개입 정도와 또다른 국가정보원 윗선의 개입 여부는 드러나지 않았다. 또 이 사건의 핵심 사안 가운데 하나로, 조직폭력과 관련해 구속된 기업인 여운환(呂運桓)이 검찰의 수사 무마를 청탁했는지의 여부와 검찰 최고위층의 로비 시도 여부 및 제2의 압력 라인의 존재 여부도 확인되지 않았다.
그 밖에 제기된 금융감독원·국세청·정보통신부·한국마사회·해양수산부 등의 개입 의혹 부분은 아예 수사 계획에 포함되지도 않는 등 개운치 않은 뒷맛을 남기고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사건이 종결된 뒤에 새천년민주당 김홍일(金弘一) 의원이 2001년 8월 광주광역시 프라도호텔에서 이용호를 만난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른바 '제주 문건 유출사건'으로 인해 이 문제가 다시 도마 위에 올랐는데, 역시 정치권의 무성한 말잔치만 있었을 뿐 결론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박동선사건 [ 朴東宣事件 ]
1976년 박동선(朴東宣)이 미국 의회에 거액의 로비자금을 제공한 사실이 보도됨으로써 시작된 한·미 간의 외교마찰사건.
언제 : 1976년
어디서 : 미국의회
누가 : 박동선
무엇을 : 거액의 로비 자금
어떻게 : 제공한 사실이 보도되어 시작된 한, 미 간의 외교 마찰사건
코리아게이트사건이라고도 한다. 그 해 10월 15일 미국의 일간지 《워싱턴포스트》는 한국 정부가 박동선을 내세워 의원들에게 거액의 자금을 제공하였다고 보도하였다. 미국 의회와 국무부는 박동선의 송환을 요구하였으나 한국 정부는 미국측이 청와대를 도청한 사실을 문제로 삼아 송환을 거부하였다. 그 후 여러 차례의 회담을 거쳐 1977년 12월 31일 한 ·미 양국은 박동선이 미국 정부로부터 전면사면권을 받는 조건으로 증언에 응할 것이라는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1978년 2월 23일 미국으로 건너간 박동선은 미국 상 ·하원 윤리위원회 증언에서 한국에 대한 쌀판매로 약 920만 달러를 벌어 이 중 800만 달러를 로비활동 등에 지출하였다고 밝혔다. 그리고 4월 3일 공개청문회에서 그는 전(前) 하원의원 R.해너 등 32명의 전 ·현직 의원들에게 약 85만 달러의 선거자금을 제공하였으며, 1972년 대통령선거에서 공화당 후보 R.M.닉슨에게도 2만 5천 달러를 제공하였다고 밝혔다.
그러나 미국 의회와 법무성은 박동선사건에 대한 뚜렷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해너와 3명의 민주당 의원만 징계하였다. 그 후 미국 의회가 미국 주재 한국대사를 지낸 김동조(金東祚)의 증언을 요구함으로써 한 ·미 간에 새로운 갈등이 유발되었으나, 막후절충을 벌여 1978년 9월 19일 김동조가 미국 하원 윤리위원회의 서면질문에 답변서를 보내고, 10월 16일 미국 하원 윤리위원회가 조사보고서를 발표함으로써 사건이 일단락되었다.
클린턴의 지퍼게이트가 왜 빠졌더냐
답글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