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월 7일 월요일

캠프(camp)

. 조교
2박 3일간 똘똘한 중학생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평생 처음으로 조교가 되보았다. 그냥 시험지나 100장쯤 채점해주거나, 모르는 것 대답해주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는 데, 단순한 TA나 과외선생보다 훨씬 책임이 큰 자리였다. 짧은 기간이지만 그 아이들과 밥도 매끼 같이먹고 수업도 같이듣고 놀기도 하고 잠도 자면서 그들의 성격을 한 번에 파악할 수 있었다. 과외선생이었다면 몇 개월을 가르쳐도 얻을 수 없는 정보와 경험들이었다.
나는 학생들과 다른 방을 써서 잠은 더 편하게 잤지만 학생들과 같은 방에서 생활한 조교들은 더 친한 조교가 됐다.

. 영재
사실 나보다 나이가 절반밖에 안되는 꼬마들이 알아봤자 뭘 알겠냐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13살의 나보다 똘똘한 꼬마들이 절반쯤은 있겠지만 나는 나이도 2배나 많고 그들이 가고 싶어하는 고등학교, 대학교를 모두 졸업한 사람이니 뭘 해도 내가 더 많이 알고 잘하고 내가 가르쳐 주기만 할꺼라고 생각했다. 나보다 13살 많은 어떤 사람들이 나를 어린이 취급하는 것처럼 나도 그들을 어린이 취급하고 있었다. 내가 생각하지 못한 수많은 아이디어로 미로찾기 로봇 문제를 해결하는 걸 보고는 상당히 놀랐다. 내 생각은 작은 플라스틱 상자 속에 갖혀있었지만 그들은 창의적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상식적이면서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있기도 했다.

. 강의
조교를 하면서 나도 강의를 같이 듣게 됐는 데, 이거 뭐 재수강하는 과목도 지루한데, 중학생에게 하는 수업이라면 10수강만큼 지루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수준은 거의 대학 강의였던 것 같다. 이거 꼬마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까?했는 데, 질문 들어보니 어느 정도는 대학생만큼 알아듣는 것 같았다. 내게도 친숙한 내용이고 흥미로운 내용이었고 모르는 것들도 30%쯤 있어서 내 수준에도 재미있게 들을 수 있는 강의였다.

. 부러움
이 꼬마들이 너무 부러웠다. 나도 13살때 이렇게 좋은 교수님들의 재미있는 강의들과 프로젝트를 해볼 수 있었다면 얼마나 행복했을까? 13살의 나는 과학보다 수학을 좋아했었지만 이런 캠프였다면 과학도 더 좋아했을 테고, 지금의 나도 좀 더 과학분야에 대해 자신감있고 나은 사람이 되지 않았을 까? 훌륭한 수학자들은 가난한 나라에서도 많고, 훌륭한 엔지니어는 부자 나라에 많은 게 순전히 우연은 아니겠지. 후생가외라는 말도 맞는 것 같고 세상이 점점 발전하고 있다는 것도 맞는 것 같다.

. 논술
애들에게 1,000자 논술을 시켰다. 과연 나였다면 40분만에 연필로 1,000자 논술을 완성할 수 있었을 까? 컴퓨터가 주어진다면 3,000자도 할 수 있었을 테지만, 연필로는 힘들 것 같다.

. 인터뷰
캠프 내내 비디오와 카메라 촬영이 이루어졌다. 내 팽생 가장 많이 찍혀본 3일이 아닐까? 꼬마들이 주연이라면 나는 조연이지만 그래도 많이 나왔다. 꼬마들 옆에 딱 붙어서 연출 사진 많이 찍었거든.
마지막에 홍보겸 조교들 인터뷰도 했는 데, 내가 제일 못했다. 나는 카메라 인터뷰는 정말 꽝이야.
나의 체감 난이도 : 카메라 인터뷰 > 연필 논술 > 구두 인터뷰 > 컴퓨터 논술

. 아침 산보
내가 가장 열심히 한건 아침 산보가 아닐까? 곤히 자고 있는 조교들, 학생들을 몽땅 깨워서 동네 한바퀴 돌고 오는 건 정말 재미있었다. 내가 가는 곳으로 사람들이 졸졸 따라오고 말 잘듣는 것도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었다.

. 심술쟁이들
세상에 심술쟁이들이 많지만 똑똑한 심술쟁이들은 그보다는 적다. "이 녀석들 어른 앞에서 심술이구나."하고 화를 낼 수도 있었지만 내 어릴 적 모습이랑 너무 비슷해서 화를 낼 수가 없었다.

. 내성적인 아이들
내성적인 아이들도 있어서 조교들이 걱정을 많이했는 데, 내 경험으로는 내성적인 사람도 한국 사회에서 인생 초반이 더 피곤하긴 하지만 느리지만 점점 좋아지므로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 인간관리
조교 1명당 4명 밖에 관리하지 않아서 어렵지 않았다. 거의 최적의 상황이었던 것 같지만 일부 세션에서는 조교 1명당 2명을 관리할 수 있다면 교육효과가 더 좋았을 것 같기도 하다.

. 카메라 감독 아저씨
그냥 비디오 열심히 찍어주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었는 데, consultant, 정보 교환 catalyst 역할을 잘 해주셨다. 모든 학생들과 조교들의 특징을 가장 잘 관찰하고 능숙한 경험과 솜씨로 젊은 조교들에 조언을 해 주셨다. 학생들 가르치는 법, 미로 꾸미기, 짐 나르기, 카드 게임 쉽게 하는 법, 맛있는 음식 고르는 방법 등..

. Beginning and end
새해의 시작과 대학생활을 마지막을 이것으로 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Say Goodnight, Not Goodbye라는 노래를 들어줘야지.

. 우승
우리 조 학생들이 얼떨결에 쥐-로봇 미로대회에서 우승을 해버렸다.
녀석들 나사 조립도 못하고 로봇이랑 별로 친하지도 않았는 데, 그렇게 운이 좋을 줄이야.
하지만 승리의 요인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 쥐를 다른조보다 어둡고 좁은 상자에 가두어두어서 심리적 컨트롤을 했다. 다른 조 쥐보다 운동도 적게하고 먹이도 안줘서 더 사나워지고 활동적이 된 것 같다. 그래서 미로에서도 가장 활발했고 두 발로 서는 일도 가장 많았다.
2. 작은 크기 - 다른 조에 비해 로봇만드는 실력이 부족해서 기능이 별로 없었어서 크기가 가장 작았고 무게도 가장 작았다. 심플한 디자인 때문에 고장도 적고 속도도 빠르고 힘도 셌다. 사실 로봇을 잘 설계하고 크게 만든 옆 조가 있었지만 큰 로봇이라서 쥐을 쉽게 밀 수는 있었지만 쥐가 막다른 길에 갖히면 빼 낼 수가 없었다.
3. 컨트롤 - 로봇을 조종 기술이 매우 뛰어나고 전략적이었다. 특히 결승에서 상대방의 로봇을 끝까지 방해하면서 끈기있게 기다리면서 기회가 오기를 5분 이상 기다렸다. 관객들에게도 지루하고 조원들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는 했지만 경쟁하는 일에서는 그런 일은 나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철저하게 경기룰을 지켰으니 말이다.
4. 다른 조의 불운 - 우리 조는 모두가 하위권 팀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예상 외로 다른 팀들이 부진하여 예선과 결승 모두에서 우리 조가 1등을 했다. 쥐가 말을 듣지 않거나 로봇이 부실하여 부서지거나 미로의 틈새를 넘지 못하는 팀들이 있었다.

. 아이들
캠프를 많이 다니는 아이들이 부럽기도 했지만 방학에 쉬지도 못하고 고생하는 걸 보면 힘들어 보이기도 했다. 부모의 지나친 기대와 압력으로 힘들어 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2박 3일 밖에 함께 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힘든 아이들을 쉬게 해줄 수가 없었다. 학교 선생님이었다면 부모님께 전화라도 해서 가끔은 아이들을 쉬게 해야한다고 말해봤을 텐데.
애들을 너무 방관해서 말 안 듣고 까부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화내는 조교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다음 번에도 화내는 조교는 안되야겠지만 아이들에게 좀 더 이것저것 시켜보고 다가가 봐야겠다.

. 블로그
캠프 준비하는 동안 써놨던 메모들 때문에 아이들이 캠프 중간에 정보를 찾다가 내 블로그를 발견하고 말았다. 사실 당황했지만 그냥 웃어주고 넘어가버렸다. 내가 무관심해버리니 녀석들도 금방 흥미를 잃었다. 들어와서 읽어보고 재미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댓글 1개:

  1. 와우 현성 대단한걸! 이런것도 하고.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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