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9월 19일 금요일

포도

작년까지만 해도 포도를 좋아하지 않았다. 포도가 맛이 없어서 그랬던 건 아니었어. 포도주스는 자주 사먹었거든.
그럼 포도가 도대체 왜 미웠을 까?
포도는 먹기가 불편하다. 먹고 나면 여기저기 지저분해지니 말이지. 바나나, 귤은 까서 꿀꺽하고 나면 물이 떨어지지 않는 껍질을 쉽게 처리할 수 있다. 반면에 포도는 먹고 나면 물이 뚝뚝 떨어지는 껍질이 남는다. 물이 튀어서 옷에 물이 들면 잘 지워지지도 않는 다. 그리고 가장 야만적이라고 생각됐던 점은 포도를 입에 넣고 난 후 씨앗을 다시 뱉어야 한다는 점. 기술적으로도 그렇고, 계속 퇘~퇘~ 거리는 건 매너도 좋지 않잖아. 포도는 매너없는 과일이다. 먹고 나면 손이 포도즙에 풍풍 불은 모습이 되고 손을 씻어도 손에 포도향이 남는다.
먹고 난 후의 포도송이의 앙상한 가지도 너무 징그럽다. 팀 버튼 감독의 '크리스마스의 악몽'에 나오는 해골들이나 그것들이 사는 앙상한 숲 같잖아.

요즘은 왜 잘 먹는 거지?
어른이 되서 주부로써의 능력도 상승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큰 개인그릇을 이용해서 깔끔하게 포도 씨앗을 밖으로 튀지않게 모을 수 있고, 포도송이도 가위로 잘라서 내가 먹을 만큼만 잘라 먹으면 된다. 남이 포도송이를 권할 때는 항상 내가 먹고 싶은 양보다 너무 많이 줘서 다 먹지 못했거든. 포도를 많이 먹으면 배도 부르고 pH가 너무 낮아서 입안과 위속이 신맛이 가시지 않고 속이 쓰린 것 같은 기분마저 든다. 위산과다는 내 평생 질환이거든.
그리고 나만의 주방과 세면대를 가지고 있으니까 너저분한 것들을 얼른 처리할 수 있다. 옷에 물이들면 내가 빨면 되고. 옷에 물들었다고 화내는 사람이 없다.

고로 포도는 내 집에서 인프라가 갖추어 졌을 때, 혼자 먹는 게 제일이네.

비슷한 이유로 게도 먹기 싫을 때가 있다. 맛은 있지만, 외골격을 부수기 어렵고 외골격의 파편이 치아에 끼면 치간을 너무 벌려놔서 불쾌하다. 하지만 너무 맛있으니 가짜(합성, 모조) 게인 게살맛을 사먹는 거겠지.

댓글 4개:

  1. =_= 포도.. 씨 먹으면 안되는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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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노란생선 - 2008/09/24 18:52
    땅콩 먹는 기분으로 그냥 씹어먹어도 상관은 없겠지만, 보통 안 먹고 뱉으니까요. 진화적으로 봤을 때 동물들의 과육을 먹어주고 씨앗을 멀리 옮겨주면 좋은 데, 씨앗까지 먹어버리면 식물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 같네요. 포도는 아니지만 씨앗에 독이 있는 식물들도 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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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상무지구 검색하다가 잘 읽고(좋은 정보 감사),

    다른 글까지 이리저리 읽다가

    윗글의 마지막 세문장에

    푸핫 웃고 갑니다(비웃는건 아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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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펭귄 - 2008/11/08 02:22
    역시 남이 발라주는 게살이 맛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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